좋아하는 마음을 한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사람들
"좋기만 한 사람. 생각해보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실망스러웠던 것도 있고 미운 것도 있고 질투하는 것도 있고 조금씩 다 앙금이 있어요. 사람들하고 수더분하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혹시 그게 내가 점점 조용히 지쳐가는 이유 아닐까,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고 버려진 느낌에 시달리는 이유 아닐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온 대사이자, 몇 년 전까지 나의 인생을 관통했던 한 문단이기도 하다. 이 대사를 매가리 없이 읊던 미정처럼 나에게도 '좋기만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굳이 꼽아보자면 '좋긴 좋은 사람'이 몇 사람 있었을진 몰라도.
대표적인 사람은 직장에서 만난 S라는 언니였다. S는 목소리가 컸다. 늘 귀에 꽂히는 호탕한 목소리 덕분인지, 큰 키에 나와 달리 위풍당당하게 걷는 모양새 덕분인지, 선 넘는 듯 아닌 듯 상대를 쩔쩔매게 하는 농담 덕분인지 그녀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눈에 띄는 그녀를 수줍은 마음으로 동경하고 있던 와중에 그녀는 나를 썩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그녀를 따라 호탕하게 웃는 날이 많아졌다. 그녀는 나를 곧잘 칭찬했다. 나 스스로도 미처 좋게 알아봐 주지 못한 나의 어떤 포인트를 그녀는 용케 알아봐 주었고 적지 않게 치켜세워주었다. 나는 S를 내 마음 폴더 중 '좋아하는 사람' 폴더에 넣었다. 이 폴더는 원래 한번 안착시키는 게 어렵지, 그 뒤는 걷잡을 수 없는 법이다.
S는 마음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퇴근하고 그녀와 가볍게 산책을 하며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날이 많았다. 분명 가볍게 시작한 산책인데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강 부근을 몇 바퀴나 돈 적도 있었다. 쩌렁쩌렁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다 들리는 목소리로 똑같은 이야기를 10번씩이나 떠드는 그녀의 이야기는 전혀 지겹지 않았고 그녀가 내일은 또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면서 매일 밤 소풍 가기 전날인 마냥 설레 했다. 이쯤 되면 느끼겠지만 S는 내가 세상에서 만나본 사람 중 말을 제일 맛깔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그녀가 하면 달랐다. 그녀도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곧잘 맞받아쳐주는 나를 만나 신이 난 듯했다. 다만 그녀가 마냥 좋기만 했냐고 묻는다면 마음 한편에서 속시원히 '그렇다'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녀가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탓이다. S는 늘 우리 주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구는 어때서 어떻고, 누구는 저래서 저떻고. 그녀는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에 대해 그녀 개인의 감상평을 하루에도 10번씩 늘어놓았다. 출신 대학, 이전 직장, 나이, 성별, 직업, 지역. 그녀가 들려주는 감상평에는 꼭 이런 '조건'이 붙어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은 그녀의 이야기들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점점 더 편엽해지는 나의 태도를 스스로 조금은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비겁했던 그때의 나는 맛깔난 그녀의 이야기 앞에서 침묵하고 때론 조용히 동조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무심코 던진 말 하나에 마음이 깊이 베이고 나서야 짧고 굵었던 그녀와의 애착관계도 완전히 쫑 나버렸다.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우리의 관계가 쫑나는 순간에도 그녀가 쉴 새 없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가 있었음에도 분명 그녀는 나에게 한때 '좋긴 좋은 사람'이었다.
좋긴 좋은 사람은 좋아하는 마음을 한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사람이다. 좋기만 한 사람이라 답하기엔 살짝 망설임이 느껴지는, 좋기는 좋은 사람. 내가 아주 가깝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나에게 '너는 좋기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칭한다면 미묘하게 찝찝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누군가의 (폭넓은) 좋아하는 사람 폴더에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하려고 한다. 만약 미정의 말처럼 마냥 좋기만 한 사람이 많을 수 없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면 좋기는 좋은 사람이라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조금 망설이다 그래도 '에잇 이 정도면 좋아하는 편이지'하고 마지못해 답하게 되는 정도의 사람이라도, 좋아하는 사람 폴더로 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에게도 점점 많아진다면 적어도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는' 시간이 적어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S와의 일화처럼 결국엔 상처받는 관계가 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좋았던 기억을 얼싸안으며 이제는 '이런 게 인생인가' 읊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