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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진소라 Mar 06. 2023

첫사랑이 죽었다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사람의 죽음

 "그 친구, 죽었대" 

 딱 그 한마디만 뇌리에 박힌 날이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18년 만에 듣는 생경한 이름 탓에 누구냐고 되물을 뻔했다. 하지만 곧 기억을 되찾았다. 초등학생 시절 내 첫 번째 단짝친구가 되어준 친구이자 6년간 애틋하고도 절절하게 혼자 몰래 좋아했던 첫사랑. 매년 발렌타인데이가 다가오면 어떻게 티나지 않는 명분을 붙여 선물을 건네줘야할까 고민했고 그러다가 그냥 쭈뼛거리며 별 이유 없이 "친구니까"라며 준비한 선물을 들이밀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이트데이에 그 친구는 늘 적당한 선물을 들고 날 찾아왔다. 모두의 관심이 따갑고도 간질거리던 그 시절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에 순수하고도 섬세하게 보답하던 마음씨 고운 친구였는데. 어디선가 잘살고 있겠지잘살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땐 참 귀여웠는데. 얼마나 멋진 어른으로 자랐을까, 하면서 혼자 입 밖에 내지 않고 조용히 떠올려보던 그런 친구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고 하니 처음에는 그저 말문이 막혔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물잔에 검은 잉크를 풀어놓은 듯, 서서히 마음 한켠이 검게 물들어갔다. 나는 이내 곧 친구의 죽음으로 생각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못한 걸까?',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했는데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건가?'와 같은 수많은 궁금증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곤 이내 당돌한 생각으로까지 번졌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곁에 있었다면 다른 결말이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누군가(는 사실 남편이다) 이렇게 말했다. 조문을 갈 정도로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마음이 이렇게까지 아주 많이 버겁냐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다른 뜻으로 곡해하여 듣지는 않았으나 이 말을 듣고 나는, 저기 먼 곳 어딘가에 있던 누군가도 죽음이란 것으로 인해 이렇게나 나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나의 울타리에서 어느 순간부터 한참 떨어져 있었던 그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 이렇게 확연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나의 마음에 박혀버렸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슬퍼하고 괴로워할 만한 관계의 거리가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으니 마음이 다할 때까지 나 혼자 몰래 애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애도는 애석하게도 의식적인 영역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곧잘 그 친구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같이 사진첩을 열어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날이 있었는데 깨어보니 실제로 정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애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마음에도 먹구름이 걷힐 기미가 없었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친구는 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질문을 매일 되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이러한 마음의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뜻밖의 답을 얻었다.  

 "엄마가 너의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면 너의 우울증이 고쳐질까?"라고 갑자기 묻는 것이었다.

 "아니"

 나는 단칼에 부정했다.

 "그럼 너를 그렇게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는데도 너는 왜 우울해?"라고 엄마가 되물었다.

 "그거랑 그건 다른 문제지."

 그때 엄마가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우울증은 누가 누구를 구제해줄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야. 그 친구의 죽음도 마찬가지야."

 탁- 하고 마음의 스위치가 켜진 기분이었다. 나의 오만함이 훤히 내비쳐지는 듯해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과 산책을 하거나 술 한잔 앞에 놓고 조잘거리는 것으로, 때로는 엄마와 야식을 먹으며 삶의 무거움을 함께 토로하며, 또 때로는 다른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편지에, 뻔하디 뻔한 멘트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온 반가운 안부 문자에, 그저 작은 호의에 불과할 수 있는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이런 것들에 나는 조금씩 기쁨을 느낀다. 이런 작은 것들이 모여 죽음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 주춤거리는 나의 뒷목을 낚아채고서 삶의 한 가운데에 똑바로 앉혀둔다. 이렇듯 나는 누군가에게 오늘을 살아갈 마음의 동력을 얻는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내가 죽고 살게 만드는 일에 다른 사람을 개입시킬 수 있다는 말과 같지는 않다. 그래서도 안 되고. 내 삶을 조종하는 방향키는 오롯이 나에게 쥐어져있다. 그래서 이토록 삶이 무겁고도 때로는 찬란한 것이겠지. 오래 드리웠던 먹구름이 걷혔다. 또, 꿈을 꾸었다. 너무나도 희미했지만, 그 친구가 환하게 웃으면서 내게 인사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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