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당한 불행을 겪는 건빵을 대하는 방법
잘 다니던 회사에서 팀이 없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꼬박 5일이 흘렀을 때였다. '다른 팀에 간다고 해야 하나, 그만두게 되는 건가, 돈은 어떻게 벌지, 아니 우리 남편 마음은 어떠려나' 등등 소심좌답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다른 팀의 (이 사건과 관계가 일절 없는 완벽한 타인인) 동료에게 이 소식을 전하며 '이제 나는 어쩌면 좋냐'고 말해보았다. 실상은 '나 지금 좀 불쌍한 것 같아'를 애써 포장한 말이었다. 얄팍한 말로라도 '아이구 저런', '어떻게 그런 일이', '역시 나쁜 회사'와 같이 뻔하디 뻔한 위로의 말들로 그간 빵꾸난 마음을 급하게라도 땜빵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남의 일이라 이렇게 쉽게 말하는 걸 수도 있지만'으로 시작하는 조언을 귓구멍에 쑤셔 넣는 척하느라 그 계획은 처참히 실패했다.
이참에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직무가 있거나 가보고 싶었던 팀이 있으면 기회가 기회인 만큼 지원이나 해보라는 조언이었다. 해보고 싶은 일이 없으면 어쩌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회사 조직도의 팀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읊었다. 마치 내가 쿨톤인지 웜톤인지 면전에서 판별하는 것마냥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에게 어울리는 팀을 찾아내려는 듯했다. 본래는 브랜드 마케터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다른 영역의 마케팅을 해볼 수도 있고 아니면 중요한 계약을 담당하는 부서에 가서 경험을 쌓을 수도 있으며 여차하면 직접 글을 쓰거나 뭔가를 제작하는 사람이 되어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해맑은 사람들을 보면 괜스레 욱하고 화가 날 때가 있다. 내 인생은 퍽퍽하기 짝이 없는 건빵인데 왜 너는 그렇게 몽글몽글 빛 좋은 카스테라 같은 건데. 왜 내가 겪는 불행을 어쨌든 저쨌든 인생의 교훈이 남을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는 건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화가 나고 억울하다. 근데 또 맑고 순수한 영혼을 보며 이렇게 속으로만 화내고 억울해하는 내가 쫌생이 같고 못나 보인다. 애초에 이런 악순환이 생기는 건 번번이 후회하면서도 기대를 버리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가 나를 충만하게 이해하고 나에게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기대. 생각해보면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소중한 얼굴들을 떠올렸을 때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적고 보니 ‘충만한 이해와 공감’이라는 말의 무게감에 비해 별것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별거 없어 보이는 게 원래 제일 어려운 법이다.)
첫째, 정말 온전히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시그널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가령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아있는 상태에서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계속 응시하며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끄덕끄덕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든지. 내 이야기에서 '나한테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지 않았는지' 찾기보다 이야기 속의 내가 했던 생각이나 감정에 더 마음을 쏟아준다든지. 뭐든 감동이다. 둘째, 첫 번째보다 조금 난이도가 높은데 나를 위해 물리적으로 시간을 쏟는 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아무리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10분짜리 대화와 3시간짜리 대화는 그 쫀쫀함이 다르다. 당연히 나를 위해 기꺼이 3시간을 내어주는 사람에게 더 큰 위로를 느낄 가능성이 높다. 셋째, 방금 말한 내용에 대한 예외이기도 한데 10분을 대화하더라도 문맥 상 꼭 필요한 질문과 리액션으로 3시간의 대화를 한 듯 극적인 효과를 내는 경우다. 나는 이걸 첫 심리상담에서 처음 경험했다. 분명 내가 9분 떠들면 선생님께서 1분 말씀하시는 루틴이었는데 그 1분의 시간이 나에겐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밀도 높은 위로로 와닿았다. 불행이든 분노든 절망이든 어떤 이름표를 달아주든 마음이 아픈 게 확실했던 그때의 나는 처음으로 앞서 말한 종류의 기대가 온전히 충족되었음을 느껴보았다.
그러니 맑고 순수한 영혼들이여, 그대들이 조언이랍시고 타당한 불행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무언가 계속 말을 건네는 순간 그이의 눈빛이 동태의 푸석푸석한 눈깔처럼 빛깔을 잃어가는 듯 보인다면 그대들이 하는 이야기가 더 이상 길 잃은 양의 앞길을 밝혀줄 유익한 조언이 아니라 청개구리 같이 못난 마음을 부추기는 잔소리일 뿐이니 부디 그대들의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 멈추어주길 바란다. 그럴 때엔 애써 끄집어낸 말보다 그저 들어주는 귀가 필요한 상태라는 걸 이해해주길 바란다. 주먹만 한 봉지 안에 코딱지만 한 별사탕이 없으면 그마저도 다 먹지 못하는 건빵. 먹을 게 죽어라고 없어도 쉬이 집어들지 않게되는 건빵. 우걱우걱 씹는 모습에 왠지 눈물 한 방울이 곁들여지면 잘 어울릴 것 같은 건빵. 건빵도 처음부터 이런 건빵이고 싶었겠는가,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