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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의 봄

갈망 3

by 신관복

어느 날 tv를 무심히 보고 있던 나는 화면에 선명하게 확대된 한 줄의 문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내었다.

이 한 줄의 문구는 평양의 나의 고향, 내가 태어난 곳의 지명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내고, 인민학교, 고등중학교, 대학교를 다녔으며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출가를 하였다. 지금 나의 이 고향의 정확한 명칭이 tv화면에서 흐르면서 이곳에서 1971년에 출생한 귀에 익숙한 어떤 남성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반역자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는 무서운 이야기들이 어떤 토크쇼에서 출연자들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평양시 대성구역 ㅇㅇ2동에서 1971년생으로 태어난 김성ㅇ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성은 분명히 우리 옆집의 둘째 아들이었던 그 김성ㅇ이 아닌가, 동명이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모든 것이 정확히 일치하는 이 사실에 나는 몸을 떨며 “세상에 이런 일이!”를 여러 번 돼 내고 있었다. 출연자는 이 김성ㅇ이와 수년을 연계하며 많은 정보를 제공받았고, 또 수시로 인터넷공간을 통해서 연계했으며, 이 과정에 어떤 경로로 탄로가 나, 이미 북쪽의 이 협력자는 가슴 아프게 처형을 당했다고 하며 협력자의 신분증을 증거물로 제시하고 있었는데 신분증 사진 속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들은 할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 신 씨 가문은 평양 8경의 하나인 대성산기슭의 청호동에서 조선시대 말부터 쭉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다가 1967년 8월 평양지방을 덮친 대홍수로 집과 가장집물을 모두 떠내려 보내고 나라에서 배정해 준 이 룡흥동의 5층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되어 나는 다음 해 이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우리 동네에 1967년에 준공된 이런 똑같은 5층짜리 아파트들이 6 개동쯤 되었는데 모두 중앙난방식이어서 나는 어려서부터 연탄아궁이나 나무아궁이를 모르고 살았다. 다들 석유곤로를 사용해 밥을 지었다.

우리 집은 5층 3호였고 김성ㅇ의 집은 5층 2호였는데 그 시절 아이들은 옆집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놀았고 부모들도 다들 동네 아이들이 의례 그러려니 여기며 끼니때가 되어 밥상을 펼치면 같이 놀고 있는 옆집애도 밥상에 불러들여 밥을 먹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한 개 층에 16 가구가 사는 긴 복도식의 아파트였다.

우리는 사 남매였고 옆집은 삼남이었는데 내 오빠와 성준오빠가 동갑으로 한 반이었고 내 남동생과 김성ㅇ이 동갑으로 한 반으로 그야말로 우리는 모두 유년과 소년시절을 함께 보내며 자랐다. 나는 내 오빠와 동갑인 성준오빠와는 어쩐지 데면데면했지만 둘째 아들인 김성ㅇ이와는 아주 잘 놀며 자랐다. 1호 집 앞에서 “여의 땅“하고 시작한 조무래기들의 뜀박질은 긴 복도 저쪽 맞은 켠 16호 집을 향해 질주한 끝에 16호 집 문을 ”찜“ 하며 끝나 그 집 아주머니와 큰 언니는 아주 출입문 두드려대는 아이들 때문에 집안에서 항상 몸살이었다. 5층짜리 아파트였지만 그 시절에는 승강기가 없어 모두 걸어서 오르내렸는데 못된 장난꾸러기 남자애들이 캄캄한 밤에 어느 층에선가 갑자기 ”귀신이다 “를 외치며 나타나 ”악“ 소리를 지르며 나자빠질 때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그 시절 모두 꽃무늬 뽀푸링 고무줄 팬티에 혼방직원피스(내리닫이)를 입고 자랐는데 차가운 5층 복도에 그냥 주저앉아 자갈 쥐기(공기놀이)를 하며 놀았다. 간혹 장난이 심한 남자애들과도 잘 어울리곤 했는데 언젠가는 아파트 옥상까지 내남동생과 김성ㅇ을 따라 올라갔다가 어른들에게 혼 난 적도 있었다. 딸이 없는 옆집 김성ㅇ의 엄마는 어렸을 때 나를 많이 귀여워했고 우리 집에서 엄마와 바느질을 같이 하면서 넌지시 사돈 하자고 말하곤 했다. 내가 시집갈 때 동네 여인 몇이 내가 가지고 갈 새 이브자리를 두 채 꾸몄는데 그때 김성ㅇ의 엄마도 동참했었다.

찬 복도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자갈 쥐기를 하며 놀았고, 조금 커서는 혼방직내리닫이를 팬티가 보이도록 팔랑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던 소녀였던 나도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며 장난꾸러기 남자애들과 내우를 하게 되었고 서로 얼굴 보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우리는 모두 처녀총각이 되어갔다.

1992년이 되면서 평양에 광복거리, 통일거리와 같은 주택지구들이 생겨나면서 24년을 함께 살아온 이웃들이 뿔뿔이 흩어져 이사를 갔다. 김일성이 사망한 직 후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금수산주석궁전이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탈바꿈하면서 동네 아파트 주변으로 사방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어느 날 지나치며 먼발치에서 바라본 5층아파트는 높다란 건물들 속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유년의 추억은 억센 건물 위의 파란 하늘에 떠있는 하얀 구름 위에서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김성ㅇ에 대한 tv프로가 끝나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내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50대의 모습들은 상상이 되지 않았고 오로지 20대, 30대의 모습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성ㅇ은 까까머리 소년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 조카들은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기들의 모습으로 이 왕고모를 쳐다보고 있다. 20대가 되었을 조카들의 나이를 하나하나 셈해보았다.

그 무서운 길을 숙명처럼 갔을 김성의 소식이 내 형제자매들의 소식인양 마음속에 찬바람이 쌩쌩 불어 서늘해진다. 형제들을 생각하면 언제부턴가 가슴 아픔은 사라지고 그리움과 함께 분노가 치솟는다.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 매일 밤 이 누이가 기도한다, 그 수난의 땅에서 제발 앓지만 말고 살아만 있기를!!! 대동강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고 어려서 잠자리에서 할머니에게서 자장가처럼 들은 이야기처럼, 언젠가는 평양에도 봄은 오지 않겠는가.


그 봄은 과연 언제나 올 것인가?


2025년 2월 23일 일요일 밤에 신관복 쓰다.


더 씀.


1970년대 말에 텔레비전으로 소련예술영화 “17일 동안에 있은 일”이라는 2차 세계대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탐정영화를 방영하여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 영화에 열광한 적 있다. 조무래기 시절엔 몰랐지만 열다섯쯤 되어 이른바 문학소녀의 꿈을 키워 나갈 때 감성에 젖어 돼 내곤 하던 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흘러나왔던 주인공의 마음을 노래하는 이 시 문구를 인용해 본다.


괴로운 마음이여

잠시라도 나를 안고

가벼운 구름 되어 날아가 주려마

내 고향으로 날아가 주려마

내가 놀던 강가 한끝이라도 보게 해주려 마

멀리 저 멀리

강가에 비가 내려 버섯이 돋았으리

자그마한 정원에 앵두가 익어

땅 위에 드리웠으리

멀리 저 멀리

어린 시절의 추억이

눈 속에 파묻힌 듯 희미해도

따뜻이 이 가슴 덥혀주네

아, 내 고향 강가, 정든 그곳으로

꿈속에라도 날아가 보고 싶구나


최근 그 tv프로그램에서 언급된 한 권의 소설을 읽었다. 필명을 반디라고 쓰는 북한작가가 목숨 걸고 반출한 “고발”이라는 단편소설집이었다. 김성ㅇ이나 반디작가와 같은 북녘땅의 작은 반딧불들이 모이고 모이고 또 모여, 캄캄한 암흑의 땅을 밝게 밝게 비추기를 어릴 적 소녀의 작은 마음으로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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