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은 어렸다.
지금의 내가 어른이 되지 못했듯이, 나의 부모님 또한 어른이 되는 길을 찾고 있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생활고에 시달려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의 부모님은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렸다. 학교에서 받아온 숙제에 엄마나이 35살이라고 또박또박 썼던 기억이 난다. 나의 부모님은 그렇게 어린 나이에, 아이 둘을 책임져야 했고, 가난을 짊어지어야 했고, 어른으로 살아야 했다.
어린 시절 나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세 들어 사는 연립주택의 옥상에 올라가 옆집 장독대에 인형을 하나씩 던져서 뚜껑을 깨는 취미가 있었고,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 뒷집의 앵두나무의 열매를 홀랑홀랑 전부 따먹었다. 어린 동생도 함께였다. 유적지를 찾는다며 주인집 마당의 잔디를 아버지의 삽으로 뭉텅뭉텅 삽질을 해놓았다. 돈에 쫓기랴, 고용이 불안정한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랴 자신이 어른인지도 모르는 젊은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연신 죄송하다를 입에 달고 사셨다.
아이와 함께 배달앱 쇼핑을 즐기는 나와는 달리, 나보다 어렸던 나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 자매에게 좋은 것을 먹이려고 하셨다. 지금 생각나는 간식은, 설탕이 뿌려진 토마토, 소의 간을 계란에 부친 부침개, 할머니 댁에서 공수해 온 수산물들 (그중에 소라를 가장 좋아했다)이다.
사설이 길어졌다.
나보다 어렸던 서른일곱 살의 아빠와 단둘이 외식을 한 시간이 있었다. 아빠가 근무하시는 회사 앞의 작은 중국집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엉겁결에 아빠랑 단 둘이 있게 되었다. 밖에서 단둘이 식사를 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아버지와 밥을 먹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나는 침묵을 깨야한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편하게 돌봐?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짜장면을 어디로 먹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쪼그마한 어린 나이에 한편으로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어렸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셨으며, 십 수 번 이사를 다녔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가 되셨다. 엄마를 많이 울리셨다. 엄마도 어렸기에 어른스럽게 슬픔을 소화하는 법을 모르셨다. 그리고 그 슬픔과 혼란은 고스란히 우리 자매에게 전이되었다.
고민에 빠진다.
나 또한 당신에게 원망을 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당신은 젊은 나이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의 나도 당신처럼 혼란스럽고 갈팡질팡 하고 있는데, 젊었던 당신들은 나에게 최선의 부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원망보다는 감사를.
외면보다는 관심을.
침묵대신, 사랑한다고 오늘 당신에게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