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규모 학교에서 살아남기 3
오랜만에 시골길을 운전하다가 '베일(bale)'을 봤다. 깨달았다. 나는 올해 무르익은 황금들판을 아니 진부한 표현을 빼면, 추수 전의 노란색 논밭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도시에서 도시로 출퇴근을 하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외곽으로 여행을 갈 시간도, 여유도, 창밖을 볼 코딱지만 한 틈조차 없었단 이야기이다. 휑하니 베일만 남아있는 마른논을 보는 순간, 자연으로 일 년을 가늠하던 작년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았다.
모내기를 하면, 아 오월 중하순이구나. 어, 이 집은 모내기를 늦게 하네. 이쪽 논은 벌써 물이 말라가는구나. 이제 벼가 노랗게 되겠다. 시계와 달력이 없이도 일 년을 가늠하고 살았던 나인데. 올해 그저 출근 퇴근 출근 퇴근.
1. 주말에 외곽에서 베일을 본 뒤 1차 충격. 아 1년 걍 버텼구나.
2. 수업시간에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 학교 숨 막히지 않아요? 엄살이 아니라, 공간자체가 숨 막혀요 콩나물이 된 것 같아요"
공감버튼을 볼에 꾹꾹 눌러주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교사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구나.
3. 수업시수 날벼락. 수업? 그래 그냥 할 수 있다. 그런데 삶의 질이 떨어진다. 하루에 5시간씩 수업을 하면, 남은 시간에 모든 민원과 업무, 담임역할을 소화해야 하는데, 굉장히 버겁다. 히스테릭해짐.
4. 학교 건물이 흔들거린다. 이건 다소 센티한 내 감성 때문이 아니다. 학교 건물이 컨테이너라(임시교사) 아이들이 쿵쿵대면 교무실이 쿵쿵댄다.
5. 정량평가 근무점수에 병가일수가 포함되었다. 정뚝떨
6. 담임수당 받으니, 창체고 뭐고 다 담임이 하라는 뉘앙스.
7. 모든 행사나 업무의 일방적 통보. 아무 의견수렴 없이, 축제 장소를 2킬로 떨어진 곳에 정한다던가.
8. 수업시수가 많으니, 동료들과 소통할 시간이 없다. 고립감
9. 17급 세 학년이 건물에 구겨져서 들어가 있는 느낌
10. 사람 없는 곳을 보려면 하늘을 보라는. 아니다 바닥도 있다.
11. 지역특성상 학군지 아이들의 개인주의, 팽배
12. 그만 써야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래서 1년 만에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1년 차가 관내내신을 쓰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기회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막상 지원한 학교에서 후순위로 밀려서 다시 내년에 이곳에서 근무할 수도 있다.
'저 사람은 부적응교사야'라는 타이틀을 감수하고 관내내신을 신청한 까닭은
그렇게라도 꿈틀 하지 않으면 25년 1년 내내 또 이렇게 히스테릭하게 근무하며 떠나려는 시도도 안 해 본 것을 후회할 것이 뻔하기 때문.
어서 12월이 지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