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교차하는 시간.
그 누구를 위한 책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를 위한 책이었다.
그 작은 책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나는 자유로워졌다. 내 마음을 어지럽혔던 불안정한 사유들, 미숙했던 나의 어린 시절의 삽화, 마흔이 되기까지의 삶의 일부를 글로 토해냈다. 그 과정은 무척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웠고 그로 인해 나는 내 그림자를 떼어 낼 수 있었다.
즉, '초기버전의 나'를 세상에 내놓는 일이 필요했었다. 그 책은 내 서사의 발화점이었고, 사유의 시작이었으며, 언어감각의 확장된 첫 번째 문이었다.
애당초 책의 상업성은 접고 출판계약을 한 터라, 그 어느 곳에도 홍보를 하지 않았으며, 출판 첫날부터 팔리는 게 겁이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책을 읽어줄 독자들에 대해 감사한마음도 들었고.
책을 낸 모든 이들을 존경하지만, 자기 통찰력과 유의미를 전달해 주는 화자와 나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책으로 인해,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나는 과거로부터 탈피할 수 있었다.
초기버전이 없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책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책을 절판시킨 이유는, '감정'이 아닌 '성장'때문이다. 매달 소소하게 들어오는 수익이 감사함이 아니라 점차 두려움이 되었고. (날것의 글이 팔려나가니 마치 벌거숭이가 된 느낌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절판을 감행할 시기라는 깨달음이 왔다. 사실 그 시발점은 더 예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인들이 어느 날부터 나를 필명으로 부르며 농담을 건네왔고(필명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내 모든 서사가 발각된 기분이 들었다.
성장단계가 바뀔 때, 예전의 언어는 반드시 벗겨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탈피의 과정이며 절판은 실패나 삭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초판을 스스로 통제하는 순간인 것이다
. 나는 내 서사를 내 손으로 리셋하고 새 판을 준비하기로 했다.
절판을 했다고 해서 그때의 내가 덜 성숙하거나, 덜 깊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때의 나도 필요했다. 다만 지금의 나는 그걸 너머서고 다음 단계로 도약할 준비 중이다.
절판 절차를 밟고 나니, 이상하게도 홀가분했다. 딱 2권만 남기고 전량 폐기를 신청했다.
안녕, 나의 불안했던 시절들아.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했던, 외로웠던, 때로는 충만했던 과거여 안녕.
나는 이제야 비로소 한 단계의 순환을 마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어떤 서사는 남기고, 어떤 서사는 떠나보내야 하는지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절판은 단순히 책의 유무를 결정하는 행정적 행위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경계를 다시 그어보는 일에 가까웠다.
오래 전의 나는 한 점의 망설임 없이 종이에 삶을 쏟아냈지만, 지금의 나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파동과 그 파동이 닿는 지점을 더 또렷하게 바라본다.
앞으로 쓰게 될 글들은 아마도 그때와는 다른 호흡과 다른 결을 가질 것이다. 삶을 덜 토해내고, 조금 더 정제된 방식으로 세계와 나를 이어 보게 될 것이다.
절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의 조율이고, 다음 문장을 쓰기 위한 조용한 준비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로운 판을 어떻게 열어갈지, 스스로에게 천천히 물어보는 일뿐이다.
오늘은 날 위해 작은 케익을 사야겠다. 초에 불을 붙이고 그렇게 조촐한 파티를 열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