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처음으로 소속된 집단에 “아니요”라고 말했다. 정확히는 직속 부장에게였다. 업무분장에 뭉뚱그려 제시되어있는 타이틀을 근거로 감당할 수 업무를 지시받았다. 당시 나는 담임이었으며(같은 업무임에도 비담임선생님들이 이미 존재하셨던 상황) 수업시수도 23시수 이었기에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내가 먼저 감정적으로 실수를 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내부 흐름에서 약간 비켜선 위치에 놓였다. 겉으로 보기엔 편안해 보일 수 있지만, 조직 안의 일상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로 이동한 셈이었다. 그 거리감 때문에 오히려 1년 내내 조용히 버티는 데 집중해야 했다.
2025년엔 다행히 주당 19시수를 맡게 되었다. 과 대표와 교무실 총무도 자진해서 맡았고, 조금 더 넓은 역할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여러 학교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는 뭔가 더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업무분장 발표 날, 내게 돌아온 보직은 모두가 부담 없이 선호하는 일종의 ‘안정적인 역할’이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배려로 이해하자”라고 마음을 정리했다.
주변에서는 “좋겠다”, “편한 자리라 부러워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실제로 해당 업무는 비교적 충돌과 갈등이 적은 편이었기에 말 그대로 조용하게 1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졌다. 나는 조직의 중심 흐름 안에 편입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 자리에서의 생존은 가능했지만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계도 명확했다.
그래서 나는 내년의 로드맵을 차분히 정리하고 있다.
아마 이 업무 덕분에 오히려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확장되기를 원한다. 사람은이라는 표현은 너무 포괄적이니, 다시 정의해야겠다. 나는 언제나 확장되기를 원한다.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는 듯 없는듯한 보직을 맡고 조용히 지낸다는 것. 어찌 보면 나에 대한 '배려'이지만 '배제'이기도 하다. 이젠 '배제'에서 '배제'될 차례이다.
그리하여 내년의 로드맵을 차분히 정리하고 있다. (어쩌면 이 업무 덕에 로드맵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작용은 '전환기 교사'의 대표적인 특징들이 드러난다는 것. 그래도 변함없는 사실은 26년에는 조금 더 나를 넓혀가겠다는 다짐이다.
이런저런 일들로 경력에 10여 년의 공백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수상경력, 부장경력, 외부활동 경력은 이미 단절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앞으로 어떻게 극복하여 명맥을 이어나가냐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미 나는 발화점을 지났다.
지나간 시간들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시기였지만, 그 침묵은 분명히 내면을 단단하게 하는 데 쓰였다.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동안 나는 조용히 층위를 쌓았고, 상황을 해석하는 언어와 시야도 그 과정에서 바뀌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그 시기를 ‘단절’이나 ‘결핍’으로 환원할 이유가 없다. 필요한 건 그 시간들을 어떻게 재배치하여 앞으로의 일에 연결시키느냐이다.
나는 지금 그 과정의 첫 단계에 서 있다. 경단녀라는 이름이 붙는 자리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는 중이다.
늦었다고 느껴질수록 오히려 출발점이 선명해지는 경우가 있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그 지점의 정확한 한가운데에 서 있다. 뒤늦은 시작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을 생각도 없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다시 확장할 수 있음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증명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