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를 떠나려는 이들에게

솔직함과 진실함에 대하여

by 한나


솔직하다 못해 속이 시퍼렇게 보이는 날것의 글들을 박박 긁어모아 책을 냈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가족 간의 갈등, 자기 구원의 반복적 서사, 상실의 슬픔등이 잔뜩 버무려진 한 편의 서사기, 아니 살기 위한 생존보고서였다. 수익을 얻기 위해 낸 책은 아니었다. 심지어 가족들도 아직 모르고 있으니.


책을 출간할 당시, 난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책에게 모든 것을 떠 넘긴 것일지도 모른다. 내 트라우마, 내가 가졌던 고민들, 자책감, 사랑, 상실 그 모든 것들을 책에 전가시켰다.

책은 그렇게 미숙아로 태어났고, 난 홀몸이 되어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때 출간한 책은 여전히 출판사의 창고에 쌓여있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받은 열 권의 예비분도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모아다 버릴까 하다가(혹여 누가 볼까 싶어) 이 녀석도 내 일부였지 싶어 캐비닛에 숨겨놓길 어언 2년째. 가끔 펼쳐보기도 무섭다. 너무너무 솔직하고 여과 없는 활자들이 당장 내 눈앞에 튀어나올까 하여.


내가 뜬금없이 책이야기를 하는 것은, 글쎄 그것마저 모호하다. 그냥 무엇인가 고백하고 싶어졌다.


며칠 전 십년지기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솔직하지만 진실하지는 않다고 생각해 왔어"

이야기의 앞뒤 맥락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건 이 친구는 나를 오랜 시간 진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처음 저 이야기를 듣고 일시정지 버튼이 눌렸다.

1. 솔직함과 진실함의 차이를 몰랐다. 2. 모든 이에게 순간순간 진솔하게 대해왔다고 생각했다. 3. 아니 어쩌면 무언가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관계 속에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해왔으니.


집에 오자마자 진실함과 솔직함에 대해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솔직함은 감정이나 생각을 즉시적으로 표현하는 행위고, 진실함은 그 감정이나 생각의 근원이 되는 존재의 투명성이다.

즉, 솔직함은 ‘보이는 진실’이고, 진실함은 ‘존재하는 진실’이란 이야기.

솔직함이 연속적일 때, 그것은 진실함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다는 것이다.


좀 더 집요하게 해석해보자.

진실함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면, 솔직함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의 정직성을 말한다.

그러나 솔직함은 언제나 ‘상대가 있는 발화 행위’이기에,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솔직함은 무례함으로, 혹은 폭력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냥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야”라는 말이 변명이 되는 이유는, 솔직함이 진실함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하지 않은 솔직함은 단지 감정의 발산이거나 자기 정당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난 매 순간 솔직함을 무기로 삼아왔다. 솔직한 표정, 솔직한 감정표현으로 상대를 내편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나도 그들 편이 되었다.) 하지만 그 솔직함은 내 감정의 파도에 따라 준위가 달라졌다. 상대방에게 매번 솔직한 인간이 되는 대신, 솔직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 되면 아예 동굴로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몰입하는 순간과 관계의 단절이 반복되었다.


그저 난 타인을 그렇게 대하면 되는 줄로만 알았다. 솔직함을 무기로 일관성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나를 꿰뚫는 이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신과 내가 가까워지면 본능적으로 왜 멀어지려고 하는지 상대방에게 굳이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주기적으로 상대방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일관성 없는 솔직함을 지켜온 것.


고맙게도 그 친구는 그 말 한마디로, 나의 부족한 영역을 확장시켜 주었다. 여러 날동안 고민한 끝에, 나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진실하지 못할 바엔, 나에 대해 고백하고. 고백하기 어렵다면, 그대들을 평온하게 놓아주고. 한발 멀리 떨어져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것.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진실함은 거대한 서약이나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단 한 번의 미세한 멈춤에서 시작되는 태도라는 것을. 내가 지금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 마음이 타인을 향할 때 어떤 파문을 남기는가를 바라보는작은 성찰 말이다.


나는 여전히 서투르고, 아마 앞으로도 완전해지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떠나려는 이들에게만큼은 담담히 말하고 싶다.

“나는 이제야 나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라고.

누군가는 그 말을 듣고 등을 돌릴 것이고, 누군가는 잠시 머물다 갈 것이다. 그것으로 된다. 진실함은 결국 관계의 지속 여부를 가르는 칼날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방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 과정의 한가운데에서, 비로소 나를 알아가겠지.


keyword
이전 09화펼쳐지지 않은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