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표정으로 복도를 지나다닌다. 나는 친절하지 못한 교사다.
곰살맞게 다가오는 아이들 조차 버겁다. 팔짱을 끼려고 하는 아이들의 손에서 팔꿈치를 슬쩍 빼고 한걸음 앞선다. 모든 것이 소모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뿐만 아니다. 양보운전을 한지도 꽤 되었다.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빼곡히 운전한다. 빈틈없이.
집에 돌아와서는 너저분해진 집을 직관하고(이미 그럴 줄 알면서도) 과한 액션으로 집을 정리한다. 굴러다니던 그릇이 개수대로 들어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러고 나면 속이 시원하느냐. 글쎄. 무엇을 위해 불친절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드는 생각은 현재 '친절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근래 몇 주동안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교사로, 엄마로,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의 학생으로, 배우자의 아내로. 상황 또한 녹록지 않았다. 연말이 되어가자, 성과 없이 일 년을 보낸 것 같아 초조했으며, 통과해야 할 여러 시험들이 압박으로 다가왔고 결국 늦게 철이 들어버린 것 같아 지난날을 비관했다. 늦었다.라는 생각에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몇 주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으며, 예민도가 커졌고 그 예민함에 또 잠을 자지 못했다.
설상가상,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같은 매우 비생산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감정은 곧 화살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고.
이미 다 먹은 땅콩버터 통을 조그만 숟가락으로 벅벅 긁어대는 모양새였다. 결국 다 소진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젠 멈추어야 한다고.
누군가 그랬지 친절은 체력이라고.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까지 갉아먹으며 그렇게 몇주를 보내온 것이다.
아이들에게 '적당히 해라'라는 말을 달고 사는 내가 '적당히 할 줄'을 모르고 버닝을 했다. 내적 에너지만 털린 것이 아니다. 얼굴은 푸석해졌고 심지어 눈에 멍이 들었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다크서클이 심해졌다.
'아렌트'는 말했다. '친절은 관계적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고 인간은 항상 한정된 에너지 상태에서 산다. 인간의 행위성은 조건적이며 우리는 언제나 피로, 맥락, 외부압력 속에서 행동한다'라고.
자원을 배분하는 것을 잊으면서까지 달려온 나는 어느새 불친절한 사람이 되어 타인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이런 나를 나 스스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이건 윤리의 문제가 아닌 에너지 구조의 한계점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언제나 나에게 윤리적 호출을 한다. 또 학생은 매 순간 교사를 향해 작은 요청들을 발신한다. 그런데 친절은 호출을 감지하는 능력이 아니라 감지 이후에 응답할 수 있는 여력에 의해 결정된다. 즉, '친절하지 않다'는 호출을 못 듣는 게 아니라 듣고 있지만 응답용량이 부족한 상태라고 판단된다.
그래서 잠시 멈추기로 했다.
준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발치로 내려놓기로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저 오늘 내가 어떤 감정인지 짧게 메모하고 수첩을 덮었다.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도 꽤나 고생을 했다. 엉켜있는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 일단 덮고 보는 것 또한 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멈추어 서 있을 때다. 당신들을 향한 반경을 다시 넓혀가야 할 때. 가만히 원의 중심에 앉아서 내가 먼저 살곰살곰 반지름을 늘려나가야 할 때.
고갈된 우물을 채우려면 우물을 퍼올린 시간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아마 우물이 다 차오르면 그대들에게 차례로 연락을 할지도 모르겠다. 미안했다고, 잘 지내느냐고, 이제야 우물이 다 찼노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