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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Nov 22. 2022

기억의 소용돌이 2

10월과 11월은 초등학생들이 여러 종류의 시험을 치르느라 바쁜 시기이다. 사실 2016년도부터 순차적으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형식의 시험제도가 폐지되고부터는 딱히 시험 기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8월 말에 개학하고부터 한 달 정도가 지나면서는 매 단원이 끝날 때마다 수행평가나 단원평가 형식으로 시험이 실시되기 때문에 10월에서 11월은 각 학년 각 반마다 과목별로 시험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들의 학습에 부담을 주지 않고 과정 중심으로 평가하기 위함이라는데 매 과정마다 시험이 있으니 예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보다 시험이 더 늘어난 것 같다. 물론 시험을 봐야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그나마 실력이 향상된다. 하지만 모든 과정에 시험이 있으니 오히려 학습 부담은 더 늘어난 것 같다. 여기에 일부 열정적인 선생님들은 쪽지 시험까지 봐서 아이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신경을 쓴다지만 쪽지시험이든 단원평가든 아이들이 시험의 무게를 체감하는 정도는 거의 비슷하기에 아이들이 시험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더 많이 늘어난 것이다. 예전의 일제 고사 방식에서는 한 학기에 두 번만 참고 견디면 되지만 시험 종류가 늘어나니, 모든 시험을 골고루 잘 봐야 하는 학생 입장에서는 매 시험이 스트레스인 것이다. 나 또한 매일매일이 아이들 시험공부로 정신이 없을 정도다.     


“선생님 저 내일 사회 1단원 단원평가래요”

“전, 이번 주 금요일에 과학 수행평가요”

“전 수학 분수 쪽지 시험이요”

"저 오늘 국어 단원평가 봤어요."

심지어 갑자기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공부방에 오는 학생들은 매시간 학년도 다르고 반도 제각각이다. 개인별로 지도하기 때문에 나는 동시에 여러 학년에게 다양한 과목을 지도해야 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시험공부를 시킬 때마다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그야말로 뒷목 잡고 쓰러질만한 사건은 덤이라 생각해야 한다.      


한 학생이 학교에서 사회 시험을 보고 왔다.  

“쌤, 공부한 데서 하나도 안 나왔어요.”


순간 당황했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 침착하게 되묻는다.

“그래? 문제가 뭐가 나왔는데?”

“고려청자랑 금속활자랑 팔만대장경에 대한 내용이요.”

 “음... 얘야, 여기 네가 공부한 교재에 별표가 되어 있고, 네가 쓰면서 공부한 흔적이 있네. 지난주에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 금속활자의 특징을 선생님 앞에서 외워 쓰기도 했는데?”

“아, 그래요?”


그럴 줄 알았다. 시험을 앞두고 이 부분에서 시험이 해년마다 나오니 이 내용은 꼭 외우라 얘기해서 학생 본인이 며칠 전에 정리한 내용을 소리 내어 여러 차례 읽었고 중요한 부분은 직접 통으로 외워 써보기까지 한 내용이다.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안 배운 데서 시험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니 공부한 내용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증거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이런 경우 이 아이는 분명 집에 가서도 안 배운 데서 시험이 나왔다며 똑같은 소리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정성껏 지도를 했음에도 학생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면 공부하지 않은 내용이라 하니, 이럴 땐 맥이 탁 풀린다.      


한 번은 시험을 보고 온 학생이 시험이 너무 쉬웠단다. 시험문제는 이렇게 쉬운데 공부방에서는 왜 어려운 거만 공부하냐고 불만을 터뜨리거나, 시험이 너무 쉽기 때문에 굳이 공부방에서 고생하면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며 부모를 조르기도 한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이 올라 시험이 쉬워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시험이 쉽게 나온 거라 얘기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 학생이 공부 중에 듣기 거북할 정도로 말을 과격하게 하길래 부모님과 통화하여 언어생활이 걱정된다고 얘기하였다. 그날 저녁에 부모로부터 심하게 혼난 모양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혼날 경우 정말 기억을 못 하는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말한다. 그래 놓고 어이없게도 이 아이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공부방 선생님은 거짓말쟁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주변 학생들에게 얘기하고 다닌 모양이다.


그 일 이후 그 학생은 공부방을 그만두었다. 학생이 공부방을 그만두는 것이 무서워서 선생님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할 일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입을 막고 지낼 순 없다.     

그러니 늘 아이들의 엉뚱한 기억에 대비를 해야 한다.   


하기 싫은 공부 하느라, 하기 싫은 공부를 시키느라 학생이나 나나 힘들 때가 있다. 서로 힘들다 보면 좋은 기억보다는 안 좋은 기억만 가득할 때가 있다.




나는 전화 통화를 하기보다는 월말마다 학부모들에게 한 달 동안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에 대해 학습 평가서를 작성해서 보낸다. 한 달 동안 학생이 공부하다 힘들어했던 점과 잘했던 것을 기억하거나 틈틈이 메모를 하여 작성해 교육비 봉투에 넣어 보낸다. 매달 마지막 주에 작성을 하는데 학생 한 명 당 작성하는 시간이 30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마지막 주는 강도 높은 노동의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 주에 몰아서 작성해야 해서 시간에 쫓기지만 시간 부족을 이유로 밤잠을 줄여가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평가서를 작성하기로 했던 초기, 되도록 빨리  끝내고 싶은 욕심에 밤늦게까지 몰아서 하다가 그다음 날 다시 작성했던 기억이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피곤에 지치다 보니 아이들의 단점만 가득 적은 것이다. 칭찬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이런저런 안 좋은 점만 가득 적었으니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되었다.


수년 전 평가서를 작성하기로 결심한 첫 번째 이유가, 되도록 아이들의 장점을 칭찬하여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피곤이 쌓이면 나도 모르게 좋은 기억보다는 아이들이 잘하지 못했던 기억, 특히 나를 힘들게 했던 기억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후로부터 매달 마지막 주에는 잠을 더 충분히 자고 보통 때보다 식사도 더 맛있는 걸로 먹고 좋은 생각만 하면서 나의 심리상태를 최상의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아이들과 함께한 좋았던 시간을 기억하고 아이들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은 아이들의 학습 향상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11월 마지막 주다.  11월 한 달 동안 있었던 나쁜 기억은 잊고 아이들과 함께 한 좋은 기억만 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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