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퍼퓸 Oct 08. 2022

붙이고 떼고

애증의 밴드


아이들은 유난히 공부하기 싫을 때 연필이나 지우개를 괴롭힌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날보다 연필이 더 빨리 짧아진다. 도대체 연필을 어떻게 쥐고 글씨를 쓰는지 연필심이 10분 간격으로 부러지기도 한다. “공부하기 싫어서 일부러 부러뜨린 거 아냐?”라고 물으면 여지없이 “아닌데요, 그냥 부러졌는데요.”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지우개에 낙서를 하다가 연필로 찔러 구멍을 내기도 하고 그러다 멀쩡한 지우개를 반토막내기도 한다. 차라리 연필이나 지우개를 괴롭히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손가락이나 다리, 발, 코 등을 괴롭히다 결국 피를 보게 된다.      


“선생님, 피나요.”

“어디?”

3학년 종범이는 긴 바지를 걷어 정강이를 보여준다. 딱 봐도 모기 물린 자리를 너무 긁어서 딱지가 앉았다가 그 딱지가 떨어지면서 피가 난 것이다. 바지 안쪽까지 피가 묻어 있다.


“또 긁어 팠구나.”

“아니에요, 그냥 만졌는데 피나요.”

“그냥 만지기만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피가 나?”

소독용 알코올을 뿌린 다음 밴드를 붙여준다.

“떼지 말고 이대로 둬야 해.”

“네.”     


종이에 손가락을 살짝 베이거나 손톱을 뜯거나 모기 물린 자리를 긁어서 상처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그 상처를 그냥 두면 그 아이는 공부를 멈추고 온 신경을 상처에만 집중한다. 그러니 매우 신속하게 다친 부위에 밴드를 붙여주어야 한다. 설령 피가 나지 않고 살짝 붉은 기만 돌아도 재빨리 밴드를 붙여 주어야 한다. 신속함이 관건이다. 그리고 밴드의 역할은 여기까지. 아픈 곳을 보호하여 마음을 편하게 진정시키는 안심 밴드의 역할은 바로 끝난다.      


밴드를 붙인 지 십 분도 안 되었다.   

“선생님, 밴드가 떨어졌어요.”

분명 밴드를 붙인 후 바짓단을 발목까지 내렸는데 밴드가 떨어지다니. 요즘 밴드는 피부 자극도 없이 접착력이 좋은데, 바지를 걷어 억지로 떼지 않고서야.

“밴드를 왜 뗐니?”

“안 뗐는데요? 그냥 떨어졌어요.”     


초등학생들에게서는 '저절로', '그냥' 되는 일들이 많다. “저절로 됐다”라는 말은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간절 화법이다. 특히 집에서 이런저런 일들로 부모에게 많이 혼날수록 “제가 안 그랬는데요.”, “몰라요, 전 아니에요.”, “그냥 떨어졌는데요.” 심지어 “저절로 떨어졌는데요,”라는 말을 자주 쓴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진득이 붙이고 있어야 하는데 그 붙인 부위가 신경이 쓰여 밴드를 만지작거리다 조금씩 뜯는다. 나야 아이들 학습 지도로 밴드를 뜯는지 안 뜯는지 모르지만 뜯는 당사자는 자신이 뜯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뜯다가 떨어지면 마침내 ‘저절로’ 떨어졌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안 붙이면 아파서 불안하고 붙이면 신경 쓰이고 불편한 애증의 밴드. 붙이고 싶은 곳을 못 붙이게 해도 안 되고 답답한 밴드를 뗀다고 그때마다 뭐라 할 수도 없다.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이 목표이니 온전히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붙이고 싶으면 붙이고 뜯고 싶으면 뜯게 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다 귀가하고 나서 청소할 때면 버려진 밴드를 심심치 않게 본다. 특히 밴드의 얇은 접착면이 책상이나 의자, 거실 바닥 등 여기저기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경우 일일이 손으로 떼야하니 나에게도 밴드는 학생들 지도를 위해 필요하기도 하고 청소할 땐 불편하고 귀찮기만 한 애증의 밴드인 것이다. 그래도 실보다 득이 많으니 밴드 상자가 비지 않도록 밴드를 넉넉히 채워 두어야 한다.      


최근 그 밴드를 다 쓰고 말았다.      


“선생님, 밴드 샀어요?”

“아, 깜빡했다. 밴드를 또 안 샀네. 얘들아, 오늘만 참아. 오늘 저녁에는 꼭 살게.”

“또 잊어버리면 어떡해요?”

“안 잊어버리도록 알람을 해둘게”

“알람을 듣고도 잊어버리면요?”

“그럼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에 아무나 선생님한테 밴드 사라고 문자나 카톡 좀 꼭 해주렴.”

“그것도 잊어버리면요?”

“아냐, 전에도 누군가는 꼭 한번 문자를 줬거든. 기억나는 사람은 꼭 문자해.”

“문자 하는 것도 잊어버리면요?”     


아, 이쯤 되면 슬슬 밴드로 인한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뭐지? 난 누구? 밴드를 미처 준비하지 못해 문책당하는 집사인가?’

 꾹 참고 한마디로 상황을 종료한다.

“오늘은 꼭 살게, 자자 공부하자.”     


다음날이다.

“밴드 샀어요?”

“아니, 아무도 문자를 안 보내 주었네. 어제 약국이랑 슈퍼에도 갔었는데 잊어버리고 다른 물건만 사 왔구나. 오늘 저녁에는 꼭 살게. 생각나는 사람 잊지 말고 톡이나 문자 주렴”     


그날 저녁에 아무 생각 없이 운동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밴드 사세요>

공부방에 오면 밴드부터 찾는 종범이가 문자를 주었다.

핸드폰으로 결제를 하려는 순간 또 알림이 온다.

<밴드 사세요>

이번엔 종범의 단짝 민호다.     

일반형 세 통과 혼합형 세 통을 샀다. 살 때 두둑이 사둬야 아이들도 나도 안심이 된다.


초등학생들의 집중력은 가는 실에 매어있는 풍선 같다.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터져 버리거나 묶여 있던 실을 놓치면 여지없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아이들의 집중력은 외부 자극에 민감하다. 그러니 밴드는 그 풍선이 터지거나 날아가지 않도록 묶어주는 공부방 필수품이다. 집중해서 공부하란 말 한마디보다 아픈 상처와 불안한 마음에 붙여준 밴드 하나가 더 나은 이유다.


얘들아, 행복은 붙이고 아픔은 떼어버리렴.


이전 03화 캐리비안베이 냄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