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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Sep 23. 2022

기억의 소용돌이

공부방에 온 목적은 부족한 공부를 하기 위함인데도 아이들은 그 목적을 자주 망각한다. 일단 자신의 공부 외에 다른 것들에 관심이 많다. 특히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에 대한 출석체크를 각자 알아서 한다. 마치 공부방에 온 목적은 다른 학생의 출석을 확인하는 것인 양 지각하는 학생이나 결석하는 학생들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아예 와야 할 누군가가 오지 않으면  더 이상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는 듯 다른 학생들에 대한 지각과 결석을 세심하게 확인한다.      


그날도 누군가 오지 않았다. 나는 오전에 미리 학부모를 통해 연락을 받아 알고 있었지만 공부방에 아이들이 들이닥치면 정신없이 시간이 가서 잠깐 그 아이의 결석을 잊고 었었던 차였다.


“선생님 수현이 왜 안 와요?”

한 아이의 출석체크가 시작되었다. 그제야 오전에 있었던 전화 통화를 기억해냈다.

“수현이 오늘 장염이 너무 심해서 학교에도 못 가고 병원 갔다가 집에서 쉰데.”

“어? 수현이 오늘 학교에서 봤는데요?”

“아니야, 오늘 아침에 수현이 어머니로부터 아파서 학교 못 간다고 연락받았는데?”

“아니에요, 오늘 수현이 교실에서 봤어요.”

그러자 다들 재판석의 증인이라도 된 듯이 심각하게 한 마디씩 한다.

“저도 봤어요, 저는 급식실에서 줄 서다가 봤어요.” 

“어, 나도 나도 5교시 끝나고 3층 복도에서 수현이 지나가는 거 봤는데.”

“저는 오늘 급식 먹고 교실 가다가 3층 계단에서 만났어요.”

“나는요 3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수현이 언니 봤어요”     

점점 더 아이들의 진술이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수현이는 학교에 갔는데 마치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거나, 수현이가 꾀병을 부리고 공부방에 나오지 않는 것이 기정사실로 되어 가고 있었다. 너도나도 수현이를 봤다고 진지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결국 나는 수현이가 오전에 장염이 심해서 학교에 안 가려다가 약을 먹고 늦게 학교에 간 것이고 공부방은 쉬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공부방이 끝나고 나서 수현이의 상태가 호전이 되었는지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를 했다. 한편으로 수현이가 학교에 출석을 했는지에 대한 진실도 알고 싶기도 했다.     

“수현아, 많이 아팠지? 약 먹고 좀 좋아졌니?”

“열이 많이 나서 넘 힘들었어요. 계속 토하다가 지금은 조금 괜찮아졌어요.”

“많이 힘들었겠구나. 음, 혹시 수현아, 오늘 잠깐 학교에 간 적 있니? 아이들이 학교에서 너를 봤다고 하는구나.”

“헐, 저 아침에 병원 갔다가 계속 집에만 있었는데요.”

“아, 그랬구나. 아이들이 잘못 본 모양이구나.”   

  

‘세상에...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나도 헐, 또다시 말려 들었구나’란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학생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아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쉽게 아이들의 이상한 기억에 말린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수현이를 봤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늘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수현이를 만났기 때문에 수현이를 본 기억을 갖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자신도 뭐라고 한마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들만의 막중한 책임감, 나는 이것을 그들의 과도한 참견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 책임감이 발동하는 순간에 기억의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최근에 리사 제노바라는 신경과학자의 <기억의 뇌과학>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일련의 상황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은 법정 속기사처럼 오고 간 말들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가 들려주지 않는다. 지나간 사건을 다시 떠올릴 때 저장되어 있는 세부 정보의 일부만을 불러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세세한 부분을 빼먹고, 어떤 부분은 재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왜곡한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고려할 여유가 없던 정보, 맥락, 관점들이 지금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종종 기억의 빈틈을 메워서 기억의 서사를 더 완벽하고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없던 정보를 꾸며내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은 모든 것이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기억과 애써 기억하고자 노력해야만 가능한 기억들에 의존하여 우리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즉 모든 말과 행동은 기억의 현장인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놀랄 만큼 자세한 부분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기억은 기억하는 과정과 그 기억을 상기하는 과정에서 심리상태나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즉 당시의 심리상태와 그에 따른 감정의 상태에 따라 그 기억이 왜곡된 채로 기억이 되기도 하고, 정확하게 기억되었다가도 상기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영향을 받아 왜곡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기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그 상황에 대한 나의 기억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당시의 아이들과 함께 했던 별나고도 재밌던 상황과 그때의 감정들로 인해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기억들은 토네이도에 휩쓸려 마법의 나라로 간 도로시의 여행처럼 낯설고 때론 엉뚱하지만 유쾌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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