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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Sep 23. 2022

캐리비안베이 냄새

가끔씩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에 미련이 남아 책꽂이 구석에 꽂혀 있는 책만 아련하게 바라볼 때가 있다. 읽는 사람을 기절시키는 책이라기에 ‘난 절대로 기절하지 않아’라고 다짐을 했지만 100여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 유명한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아니 ‘홍차에 적셔진 마들렌‘에 공감하게 되면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완독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마들렌을 잘 만든다는 빵집까지 찾아가 책의 장면을 떠올리며 마들렌을 먹어 보았다. 잘 만들어진 마들렌이라면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졸지 않고 찾아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홍차에 적시지 않아도 촉촉함이 가득했지만 다른 빵들에 비해 유난히 기름진 냄새에 높은 칼로리의 부담감 남기고 이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차라리 내게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의 추억을 얘기하라 하면 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금방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화적 이질감 때문인가, 프루스트의 섬세한 기억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데 동참하는 것은 무리인가, 왜 나는 공감하지 못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다 결국 내가 굳이 홍차에 적셔진 마들렌에 공감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누구나 자신의 기억을 돕는 냄새가 있고 그 냄새는 자신만 기억하는 냄새이기에 나만의 냄새를 추억하기로 결심했다.      


나에게도 마들렌과 홍차 같은 우아함이 풍기는 냄새는 아니지만 독특한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내가 운영하는 공부방은 초등학생들이 학교 끝나고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다니는 곳이다. 저학년들이 먼저 끝나고 바로 오기 때문에 4교시 후 급식이 끝나는 오후 1시 전후로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오전 시간이 비어 여가 시간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직장이 가정집이다 보니 매일 깔끔하게 가정집의 흔적들을 치워내야 한다. 그날 오전에도 미루던 화장실 청소를 급하게 하게 되었다. 여러 학생들과 함께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라 좀 더 신경 써서 청소하지 않으면 물때와 곰팡이가 쉽게 피고 냄새도 나기 때문에 염소계 표백제가 들어 있는 욕실 세정제를 사용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욕실 세정제가 다양하지 않아 바로 락스를 물에 희석하여 사용했지만 가정집에서 쓰기엔 냄새가 너무 고약하고 청소할 때 건강에도 좋지 않아 시중에 락스 냄새를 줄이고 세정력은 그대로 가진 세정제를 사용한다. 그래도 세정력이 강한 제품에서는 일반 락스 못지않은 냄새가 남는다. 마스크를 쓰고 급하게 세정제를 뿌리고 솔로 닦아서 청소를 끝냈다.


아파트 가정집 화장실은 대부분 창문이 없고 환풍기가 달려 있다. 환풍기를 틀어도 냄새가 쉽게 빠지지 않는다. 현관문과 베란다 창을 모두 활짝 열어 환기를 했는데도 화장실 문만 열면 락스 냄새가 나서 냄새에 민감한 학생들이 싫어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던 차에 2학년 학생들이 한 명씩 들어왔다.


저학년들은 미리미리 화장실을 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학교에서 공부방으로 바로 오면 화장실부터 간다. 화장실에 급하게 들어갔던 2학년 여학생 JS가 화장실을 나오면서 갑자기 활짝 웃는다.      


“와! 선생님, 화장실에서 캐리비안베이 냄새가 나요, 전 캐리비안베이 냄새가 너~무 좋아요!”     


순간 ‘캐리비안베이 냄새?’ ‘이게 무슨 말이지? 왜 화장실에서 캐리비안 냄새가 난다는 거지?’라며 아이의 표정을 보면서 티 나지 않게 머릿속 검색기를 가동했다.

‘도대체, 캐리비안베이에서 무슨 냄새가 나길래....’      


그러던 와중 다른 2학년 학생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야, 정말 캐리비안베이 냄새네. 나도 캐리비안베이 냄새 좋아해요. 아 캐리비안베이 또 가고 싶다”라며 좋아하는 게 아닌가.     

갑자기 나머지 아이들이 화장실 앞에서 서로 냄새를 맡겠다면서 우르르 몰려 간다.

“나도 나도”

“정말이네, 캐리비안베이 냄새다, 와~~”     


그제야 아이들이 화장실 청소 후 남아있는 락스 냄새를 캐리비안베이 냄새라며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각자의 집에서도 화장실 청소를 하면 종종 맡았던 냄새였을 텐데 JS의 “캐리비안베이 냄새”라는 한마디에 그동안 집에서 맡아왔던 모든 락스 냄새를 잊고 오늘만은 마치 캐리비안베이에 온 것처럼 좋아서 호들갑이다. 그날 아이들이 맡은 락스 냄새는 오로지 캐리비안베이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라도 되는 듯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면서 좋아했다.     

이후에도 몇몇 다른 학생들이 화장실에 락스 냄새가 남아 있을 때는 수영장 냄새가 난다며 좋아했다.      



나에겐 화장실 청소를 할 때마다 맡아야 하는 역한 냄새가 아이들에게는 즐겁게 물놀이하던 추억의 냄새였다. 수영장 물을 염소로 소독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요즘은 소독을 심하게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물놀이를 하면서 느꼈던 모든 추억을 캐리비안베이 냄새라고 바로 이름 지은 JS의 순발력과 감성에 감탄했던 하루였다. 놀랍지 않은가. ‘캐리비안베이 냄새’라는 말속에 아이가 느꼈을 물놀이를 즐기는 시원함과 즐거움, 행복감이 락스 냄새보다 강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나는 그때 이후 그 아이로 인해 화장실 청소를 할 때마다 캐리비안베이 냄새도 떠올리고 날이 무더워지기 시작하면 학교에는 체험학습 신청서를 쓰고 공부방은 그냥 쉬면서 캐리비안베이에 갔던 JS를 떠올린다. 이제는 중학생인 JS가 올여름에도 신나게 캐리비안베이를 누비며 놀았을 모습도 상상해 본다.      


“전 캐리비안베이 냄새가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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