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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회사 사원이지만 엔지니어링 회사로 출근합니다

일본 특유의 인사제도 출향(出向)에 대하여

by 지영





한자와 나오키 차장, 도쿄센트럴증권으로 출향(出向)을 명한다!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드라마는 지난 2013년 일본에서 40%가 넘는 시청률을 올렸고, 지금까지도 직장 드라마의 전설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주인공 한자와 차장은 은행 내 부패한 상사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통쾌한 복수극을 펼친다.


하지만 승진은커녕 출향을 당하는 결말에 많은 일본인이 충격을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인사이동이지만 실제로는 좌천에 가까운 조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 사회에서 출향은 종종 징계성 인사의 상징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실제 기업 현장에서의 출향은 보다 복합적인 제도다. 조직 간 인력 순환, 기술 이전, 인재 육성을 위해 활용되며, 개인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얻을 기회가 되기도 한다.


출향의 형태로는 재적출향(在籍出向)과 전적출향(転籍出向)이 있다. 전자는 원래 회사의 신분을 유지하고 일시적으로 그룹사나 다른 회사로 이동해 근무하는 형태, 후자는 완전히 소속을 옮기는 형태다.



나 또한 후쿠오카에서 도쿄 본사로 이동하면서 한 차례 출향을 경험했다. 내가 근무했던 설비구매부의 상위 조직인 조달본부는 플랜트 설계, 설비 유지보수 등 엔지니어링 기능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그룹사에 분리 배치해 전략적인 설비 조달을 도모하고 있다. 계열사 간 기능을 나누는 구조는 일본 대기업에서는 흔한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본사로의 전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룹사로 파견되는 재적출향자(在籍出向者)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인사제도이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내가 경험한 출향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그 속에서의 소감을 조금 나누어 보고자 한다.


경험에 기반한 개인적인 의견이니 가볍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동 후에도 부서 회식에 불러주는 동료들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


가장 큰 장점은 시야가 넓어진다는 점이다. 내가 근무했던 엔지니어링사는 화학 회사와 달리 제조의 장소가 되는 플랜트 그 자체를 만들기 때문에, 외부 고객의 플랜트 건설을 수행할 때 필요한 자재 조달을 담당했다. 덕분에 식품 메이커, 의약 메이커, 라피더스 등 다양한 플랜트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외자구매의 경우 업계가 다양한 만큼 구매하는 기기도 다양하다. 가령 식품 메이커라면 고기를 자르는 커터나 채소 껍질을 벗기는 기계를 조달하기도 한다. 목적에 따라 공장 본연의 자세는 크게 바뀌고 필요한 설비나 자재도 바뀌기 때문에 폭넓은 시각을 배울 수 있었다.


또 엔지니어링 회사의 설계 단계부터 시공·운전·보전까지의 프로세스를 알게 되니, 그룹 전체의 밸류체인 속에서 설비 조달의 역할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 일해보지 않았다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것들을 매일 마주했다.




소속감의 경계에서


하지만 어려운 점도 분명 존재한다. 가장 크게 느낀 건 실제 소속과 다른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양쪽 모두에 속해 있으면서도, 완전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입사 동기들을 만나도 나만 근무하는 건물과 회사가 다르니, 업무에는 큰 지장이 없더라도 심리적으로 소속 회사와 점점 멀어지는 듯한 이질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사소한 행정 절차의 번거로움도 빼놓을 수 없다. 가령 경비 정산, 시스템 접근 권한 등 두 회사의 규정을 확인하며 처리해야 했다. 때로는 양쪽 시스템을 모두 알아야 하고, “이건 어느 쪽 절차를 따라야 하지?”하고 잠시 멈칫하게 될 때도 있었다.






1년 가까이 출향을 경험해보니 장단점이 참 양면적이다. 가령 회사가 바뀌니 새로운 업계와 업무, 인간관계에 적응해야 하기에 스트레스 요인이 되지만, 동시에 새로운 회사의 문화, 시스템, 가치관 속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적응력과 유연한 사고를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보면, 각 그룹사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수익을 창출하는지를 알게 된 점은 큰 수확이었다. 단순히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회사 전체의 움직임을 숲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이를 계기로 지금은 다시 본적 회사인 화학 회사로 돌아와 사업부에서 일하고 있으니 출향은 내 커리어의 큰 전환점이었다. 제조 공장을 시작으로 그룹 회사, 본사까지 다양한 조직과 업계를 경험한 것은 나만의 스페셜리티이자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는 자산이다.



근무 마지막 날 부서 동료가 써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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