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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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혼자 먹는 끼니는 귀찮아 1탄
엄마들은 늘 식구들이 다 먹고 남은 밥만 먹고, 남은 반찬 긁어서 대충 비벼 먹고, 식은 밥 먹고. 주부 해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 그거 그냥 귀찮아서였어. 종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잔일 해치우고 나면 내 뱃속에 들어가는 것까지 신경 쓰기가 너무너무 귀찮다.
평소 아점 한 끼에 그치는 끼니 귀찮음이 애인님이 본가에 가시는 주말이 되면 극에 달한다. 잘 먹지 않던 라면도 두 번 정도는 끓여 먹고, 죄책감 때문에 시키지 않던 배달음식도 한 번쯤 눈 딱 감고 주문한다(배달비 아까우니 한 번에 2인분 정도 시켜서 하루 끼니 뚝딱).
그러다 보면 종종 현타가 오기도 한다. 식구가 있을 때는 정성껏 차린 끼니를 먹다가 혼자서 대충 먹는 부실한 끼니를 맞이하면 그 격차가 괜히 서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귀찮음이야 까짓 눈 딱 감고 극복하면 되는 걸 매번 이렇게 초라하게 먹어도 될까. 가뜩이나 혼자라 쓸쓸한데 말이지.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위장을 벗어나기 시작한 허기를 억지로 달래고 비장한 마음으로 주방 앞에 섰다. 이번 연휴는 절대 끼니를 소홀히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첫 메뉴는 카레다. 우리는 카레를 무척 사랑한다. 집에는 고형 카레가 항상 구비되어 있다. 감자, 양파, 당근은 항시 준비되어 있고, 심지어 일전의 캠핑 때 남은 돼지고기도 있다. 심지어 엊그제 애인님의 주문으로 크림파스타를 하고 남은 생크림까지 있다. 좋아 오늘은 크림 카레다.
꽁꽁 언 돼지고기를 전자레인지에서 해동을 시키고, 뜨거운 물에 고형 카레를 풀어준다. 그 사이에 나머지 재료를 손질한다. 감자 하나, 당근 한 개, 양파 반 개.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준비된 재료를 한 번에 넣어 볶기 시작한다. 마침 돼지고기 해동도 끝났으니 잘게 잘라 냄비에 투하한다. 건더기들이 어느 정도 익었을 때 생크림과 물을 붓고 끓기 시작할 때쯤 녹여둔 카레를 부어준다. 중불에서 한동안 푹 끓여주면 짜잔, 크림 카레 완성이다. 전날 먹고 남은 찬밥에 카레를 휘리릭 부어서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해냈다.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소스를 발견했으므로 저녁 메뉴는 파스타다. 양파 반개를 잘게 썰고 깐마늘이 없으니 대충 다진 마늘로 대체한다. 올리브유를 넉넉히 두르고 약불에서 천천히 끓이듯 볶아준다. 마늘의 색이 짙어지고 양파의 색은 투명해질 때쯤 버섯과 베이컨을 넣고 볶아준다. 마침 거의 다 삶아진 면과 파스타 소스를 넣어준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고 그릇에 옮긴 다음 파슬리 가루를 뿌려 완성한다.
분명 백선생님이 1인분은 500원 짜리 동전 만큼이라고 하셨는데. 전세계적 인플레이션 경향과는 별개로 우리집에만 디플레이션이 온걸까, 500원어치가 1000원어치가 되어있다. 비록 양 조절에 실패하여 세 그릇이나 되었지만 끝내 해치웠다.
다소 힘은 들었지만, 훌륭히 연휴 첫날 끼니를 해냈다. 냉장고 안팎의 식재료들을 살피며 열심히 메뉴를 시뮬레이션 한다. 내일은 또 내일의 끼니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