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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보 Oct 12. 2022

25. 자기야 나 고백할 게 있어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25. 자기야 나 고백할 게 있어      



우리가 만난 지 어언 십여 년. 많은 것들이 변했고, 또 변하지 않기도 했지. 다행히도 우리는 좋지 않았던 것을 좋게 변화시켜왔고, 좋은 것들을 그대로 유지해왔어.   


다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 중 조금 불행한 사실 하나가 있어.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래왔지. 언젠가 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왔지만 너의 기쁨을 망치고 싶지 않아 속으로만 삼켰던 말이 있어.      


나 사실, 매운 거 못 먹어. 


물론 당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 하지만 당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나는 매운 거 못 먹어. 그동안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잘 먹는 것처럼 연기했을 뿐이야. TV도 같이, 걸을 때도 나란히, 식사도 함께. 당신은 ‘함께’를 중요하게 여기니까. 나도 그 ‘함께’를 깨기 싫었을 뿐이야.    


하지만 당신과 매운 음식을 ‘함께’ 먹을 때마다, 나는 ‘홀로’ 고통받아야만 했어. 내 혓바닥에 난 불은 계란찜, 냉콩나물국도 어쩌지 못했고, 적어도 하루 동안은 변기 위에서 쓰라림에 눈물을 흘렸어.      



당신은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 매운맛이 익숙하지. 하지만 난 매운 거라고는 ㅅ라면도 못 드시는 어머니 아래 자랐어. 식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매운 음식은 쌈장 정도였지. 집에 라면도 ㅈ라면 순한 맛 외에는 없었어.  

 

당신과 처음 엽X 떡볶이를 먹던 날, 내 배를 채운 건 쿨X스와 단무지, 그리고 주먹밥이었어. 이마에서 쏟아지는 땀이 내 눈물도 가려주기를 바랬지. 당신은 그날 무척 행복해했으니까. 당신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   

얼마 전 유X브에서 엽X 떡볶이 레시피를 발견했다며 기뻐하던 너에게 난 어색한 미소밖에는 짓지 못했지. 네가 결국 베트남 고춧가루를 주문했을 때, 나는 한동안 택배 상자에 손조차 대지 못했어. 하지만, 그날은 오고야 말았지.


이런 위험한 물건을 민간에 유통해도 되는 겁니까?


지난 주말, 당신은 이번 주 안에 엽X 떡볶이를 먹겠다고 선언했어. 올 것이 온 거지. 당신이 보내준 레시피 영상을 보며 종이에 옮겨 적었어. 맙소사, 고춧가루의 양이 다른 모든 재료를 합친 것보다 많네.   


혹시라도 실수로 더 맵게 만들까 봐 저울도 꺼냈어. 애초에 안 매운맛, 매운맛, 두 냄비에 조리하려 했지만, 계량에 집중하느라 매운맛밖에 준비를 못 했네. 멍청한 놈.   


드디어 문제의 베트남 고춧가루를 열었을 때, 난생처음 화생방 훈련을 받던 때가 떠올랐어. 연기 속에서 당황한 나머지 정화통을 제대로 끼우지 못했지. 방을 나설 때까지 숨을 꾹 참았지만, 일부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어. 오늘 그때 만큼이나 기침을 한 것 같아.      


물론 난 가능한 이 사실을 네게 숨길거야. 적어도 소화기관에 암이 발병하기 전까지. 이러나 저러나 나도 너와 '함께' 하는게 좋으니까.


여러분, 여러분도 각자의 애인, 배우자에게 숨겨야만 하는 사실이 있나요? 있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시나요? 오늘 저는 계란찜, 장국, 쿨X스로 견뎌보려 합니다. 부디 여러분은 즐거운 저녁 식사 되세요. 


※ 오늘의 잘한 일


- 당분간 매운 거 먹고 싶다는 얘기 안 나올 만큼 매운 떡볶이를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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