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25. 자기야 나 고백할 게 있어
우리가 만난 지 어언 십여 년. 많은 것들이 변했고, 또 변하지 않기도 했지. 다행히도 우리는 좋지 않았던 것을 좋게 변화시켜왔고, 좋은 것들을 그대로 유지해왔어.
다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 중 조금 불행한 사실 하나가 있어.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래왔지. 언젠가 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왔지만 너의 기쁨을 망치고 싶지 않아 속으로만 삼켰던 말이 있어.
나 사실, 매운 거 못 먹어.
물론 당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 하지만 당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나는 매운 거 못 먹어. 그동안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잘 먹는 것처럼 연기했을 뿐이야. TV도 같이, 걸을 때도 나란히, 식사도 함께. 당신은 ‘함께’를 중요하게 여기니까. 나도 그 ‘함께’를 깨기 싫었을 뿐이야.
하지만 당신과 매운 음식을 ‘함께’ 먹을 때마다, 나는 ‘홀로’ 고통받아야만 했어. 내 혓바닥에 난 불은 계란찜, 냉콩나물국도 어쩌지 못했고, 적어도 하루 동안은 변기 위에서 쓰라림에 눈물을 흘렸어.
당신은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 매운맛이 익숙하지. 하지만 난 매운 거라고는 ㅅ라면도 못 드시는 어머니 아래 자랐어. 식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매운 음식은 쌈장 정도였지. 집에 라면도 ㅈ라면 순한 맛 외에는 없었어.
당신과 처음 엽X 떡볶이를 먹던 날, 내 배를 채운 건 쿨X스와 단무지, 그리고 주먹밥이었어. 이마에서 쏟아지는 땀이 내 눈물도 가려주기를 바랬지. 당신은 그날 무척 행복해했으니까. 당신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
얼마 전 유X브에서 엽X 떡볶이 레시피를 발견했다며 기뻐하던 너에게 난 어색한 미소밖에는 짓지 못했지. 네가 결국 베트남 고춧가루를 주문했을 때, 나는 한동안 택배 상자에 손조차 대지 못했어. 하지만, 그날은 오고야 말았지.
지난 주말, 당신은 이번 주 안에 엽X 떡볶이를 먹겠다고 선언했어. 올 것이 온 거지. 당신이 보내준 레시피 영상을 보며 종이에 옮겨 적었어. 맙소사, 고춧가루의 양이 다른 모든 재료를 합친 것보다 많네.
혹시라도 실수로 더 맵게 만들까 봐 저울도 꺼냈어. 애초에 안 매운맛, 매운맛, 두 냄비에 조리하려 했지만, 계량에 집중하느라 매운맛밖에 준비를 못 했네. 멍청한 놈.
드디어 문제의 베트남 고춧가루를 열었을 때, 난생처음 화생방 훈련을 받던 때가 떠올랐어. 연기 속에서 당황한 나머지 정화통을 제대로 끼우지 못했지. 방을 나설 때까지 숨을 꾹 참았지만, 일부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어. 오늘 그때 만큼이나 기침을 한 것 같아.
물론 난 가능한 이 사실을 네게 숨길거야. 적어도 소화기관에 암이 발병하기 전까지. 이러나 저러나 나도 너와 '함께' 하는게 좋으니까.
여러분, 여러분도 각자의 애인, 배우자에게 숨겨야만 하는 사실이 있나요? 있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시나요? 오늘 저는 계란찜, 장국, 쿨X스로 견뎌보려 합니다. 부디 여러분은 즐거운 저녁 식사 되세요.
※ 오늘의 잘한 일
- 당분간 매운 거 먹고 싶다는 얘기 안 나올 만큼 매운 떡볶이를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