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선물로 여행은 어때?
좀 헤매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는 거죠. 그렇게 사니까 인생이 알아서 재밌는 방향으로 굴러가던데요? _ 갯마을 차차차
11월 말, 민이의 생일이다. 생일선물을 하염없이 고민했다. 물욕도 워낙 없는 터라, 선물을 고르기가 참 애매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생일 선물로 여행은 어떨까? 나는 곧바로 민이에게 스리슬쩍 만약~ 여행을 간다면 어디를 가고 싶어?라고 물었다. '폴란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폴란드, 좋지. 사실, 민이랑 내가 연애를 시작하는 날에, 민이는 친구들이랑 폴란드를 갈 예정이었다. 물론 이후 취소가 됐지만.
그때의 아쉬움 때문이려나, 나는 폴란드를 보내줘야겠다 속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기차 티켓과 숙소를 예약했다. 훗.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짧은 시간, 주말을 껴 바쁜 민이의 일정을 욱여넣었다. 폴란드 여행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되려 예상하지 않은 곳을 가려니 설레는 마음이 한층 앞섰다. 그날의 뉴스를 보기까지는.
폴란드 미사일 피격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가 방문하려던 바르샤바와는 거리가 멀어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조금 두려워졌다.
내 머릿속에는 비상벨이 울렸다. 바로, 기차표를 취소할 수 있는지 메일을 보냈고, 에어비앤비 숙소에는 채팅을 보냈다. 돌아온 답변은 '바르샤바는 안전하다. 취소가 불가능하다.'였다.
원래는, 서프라이즈로 무작정 기차에 태워 데려갈 예정이었으나, 계획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사실, 내가 생일선물로 여행을 같이 가려했어. 근데, 그게 바르샤바야. 폴란드.'
여행? 여행? 해외여행이 독일을 제외하고는 처음인 민이는 한동안 여행이라는 단어에 꽂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폴란드라니까? 엊그제 미사일... 사건이 있었잖아. 라며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렇게 우리는 여행의 낭만은 잠시 미뤄두고, 바르샤바 안전 조사에 들어갔다. 각종 기사부터, 유럽 커뮤니티에 바르샤바의 안전을 체크했다. 다행히, 예상보다 이 문제는 전반적으로 금방 해결이 되었고, 바르샤바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행이었지만, 결국 나의 서프라이즈는 망친채로 바르샤바로 가는 기차를 탔다.
도착한 바르샤바는 생각보다 멋진 동네였다. 저렴한 물가에, 무언가 따스한 분위기였다. 성냥팔이 소녀가 창문너머로 바라보던, 크리스마스에 따스하고 화목한 가족의 느낌이랄까. 무언가 포근하고, 아늑한 기분이었다. 전통 음식들도 그런 느낌이었다.
음식들도 정말 친숙했다. 물만두와 군만두 느낌의 폴란드식 만두, 피에로기(pierogi)와 내장탕 느낌의 폴라키 (flaki), 양배추와 고기가 들어간 수프느낌의 폴란드식 스튜 비고스(bigos)가 대표메뉴였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놀라운 맛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익숙하고도 새로운 맛에, 우리가 폴란드에 왔구나. 를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아늑한 느낌과는 별개로, 정말 쇼킹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우버를 타고 숙소로 가던 길, 우버기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바르샤바의 재미있는 놀거리를 추천해 달라고 하니, 커플 바꾸기 즉 이른바 '스와핑'을 추천해 줬다. 잘못들은 줄 알고 재차 되물었으나, 본인은 그러하지 않으나,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그런 유흥을 즐긴다며, 혹 우리도 그런 취향이 있다면 이곳에서 즐기다 가라고 했다. 실제로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그런 취향을 즐기고 받아들이는지는 확인할 바가 없으나, 나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었다. (난 그저 놀거리, 볼거리를 추천해 달라고 했을 뿐인데... 흑흑)
정말 높게 뻗어있는 크리스마스트리. 낮에는 큰 인형탈을 쓴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저녁에는 불쇼를 하는 바르샤바. 그냥 거리를 걷기만 해도 끝없는 볼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프라하나, 파리, 런던 같은 크고 유명한 도시들과는 달리, 바르샤바는 워낙 크리스마스에 관련해서는 소문이 덜한 터라, 기대를 거의 안 한 채로 방문한 것임에도, 기대 이상으로 바르샤바는 재밌는 놀거리가 가득했다.
찰칵. 누군가가 길을 걷는 우리를 찍었다. 그러고는, 우리가 나온 사진을 건네주었다. 아, 이거 딱 봐도 사진 팔려는 거네! 이미, 유럽여행을 반년째 하며 경계심이 맥스(Max)인 상태였다. 아, 안 사요라고 영어로 연신 외치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따스한 미소를 보이던 사진을 찍어주신 여성분은, 이거 선물이야. 라며 우리에게 사진을 건네주었다.
정말로 선물이었다.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민아, 좀 웃지! 사진 속엔 민이의 경계심 가득한 표정만이 담겨있어, 아직도 볼 때마다 빵빵 터지고는 한다. 휴 그래도, 나는 웃을 때 포착이 되어서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사진이다. 새삼, 이런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는 호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따스해졌다.
때로는 길을 잃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그 덕에 더 많은 것을 얻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기대하지 않던 바르샤바에서 따스한 기억들을 가득 안고 온 것처럼, 때때로는 긍정적인 길치가 되어보는 것도 우리의 인생을 더욱더 재밌는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