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ft. 피노 누아)
"누나, 나 좀 물어봐도 돼?"
전화벨 너머에는 약간의 피로함과 짜증이 가득한 홍홍이(Queen 나봄 동생)가 있었다. 느낌이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기엔 제법 길 것 같다. 동생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한 후 짐을 챙겨 카페 밖을 나섰다.
"무슨 일 있어?"
"00이가 요새 자꾸 알파남, 베타남 거려서 짜증나. 나더러 알파남이 되려면 이런 것도 해야 한다, 저런 것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미치겠어."
"요즘 SNS에서 유행하는 단어잖아. 00이가 너랑 자기계발 같이 해보고 싶어서 그랬나보지."
"내가 제일 짜증나는게
뭔지 알아, 누나?
SNS에서 말하는 알파남이란
기준에 날 끼워맞추려는 걔가
지금은 너무 질려.
누나가 봤을 때 내가 그렇게
많이 부족해보여? 있으면
좀 말해주라."
웬만한 일로는 자기 속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동생이 본인이 오죽 답답했으면 누나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하소연을 할까 싶었다.
[ 알파남은 이런 사람이고,
퀸이 되고 싶다면 이러저러한
일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자가 알파남을 만나지 못하면
팔자가 어그러지고, 찌질한 베타남
곁에서 남성성 발휘해서 힘들게 산다.
-내가 현재까지 대충 이해한 알파남, 베타남 이야기 ]
모두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 예쁜 여자는 고시 3관왕이고, 능력 있는 남자는 결혼 시장에서 최상위 포식자라는 것. 팍팍한 경제 상황으로 인해 예전처럼 결혼을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기대서 할 수 없다는 것.
"Young and Rich,
Tall and Handsome.
Young and Rich,
Pretty and Sexy."
돈은 사람들의 욕구가 가리키는 방향 끝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리고 보다 나은 사람을 골라 안락한 연애와 결혼 생활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돈 냄새 잘 맡는 사업가들이 놓칠 리가 없다.
여자에게는 '이걸 읽지 않으면 좋은 남자 못 만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할 것이다'라는 불안 심리 조장 마케팅을 사용한다.
남자에게는 '이걸 읽으면 돈 많은 알파 메일이 되어 어리고 예쁜 여자랑 결혼할 수 있다'라는 기대 심리 조장 마케팅을 구사한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블로그 글쓰기를 하기 전의 나 역시 이 마케팅에 일정 부분 휘둘렸음을 인정한다. 내가 오랜 시간 그려왔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꿈을 조금이라도 빨리 현실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마케팅 어디에도-
"네가 진짜 원하는 남자는
어떤 사람이야?"
이란 물음을 제시하는 곳은 없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언니, 난 알파남이 필요 없어요."
당당하게 자신의 남자 취향을 말하는 지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종 블로그에서 '알파남과 결혼하세요!', '퀸이 되어야 합니다!'를 열창하는 것이 진절머리 치고 있던 터라 당당하게 소신을 말하는 지인의 모습이 생경했다.
"난 집안 사업을 물려 받을 사업가예요. 지금 아빠 밑에서 사업 배우는게 즐겁고, 앞으로 이 사업을 더 크게 키우는게 내 꿈이에요. 그러니 내게 필요한 건 나 대신 가정을 살뜰하게 보살펴 줄 수 있는 남자겠죠."
"음, 그럼 소위 <알파남>이라고 불리는 리더십 강한 남자는 너랑 안 맞겠구나. 엘리자베스 여왕님의 부군이신 필립공 같은 스타일이 필요하겠어."
"역시 언니야! 맞아요. 난 내 경영권을 남편과 공유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건 우리 아빠랑 해외부를 맡을 동생이랑도 이야기된 거예요."
소탈하게 자신이 바라는 남자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지인의 모습에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막연하게 내가 바라는 남성상과 내가 꿈꾸는 가정의 모습을 그려왔지, 그녀처럼 현실적으로 접근해본 경험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네 말 덕분에 방금 생각이 명료하게 정리됐어. 애초에 남자를 알파남, 베타남 같이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문제야.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무 자르듯 구분지을 수 있겠어? 이건 여자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렇지. 나도 사실 엄청 고민했어요. 나인들 찌질이랑 결혼하고 싶겠어요? 근데 나한테 필요한 건 리더십이 강해서 나를 끌고 갈 남자가 아니라, 내가 힘들 때 곁에서 위로를 건내줄 수 있는, 다정다감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남자더라고요.
다정다감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게 찌질한 건가요? 난 아니라고 보는데.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데 꼭 필요한 능력이 그거 아닌가요? 무식하게 '나는 남자다!'를 외치며 마구잡이로 리드하려고 하는 건 사회적 지능이 떨어지는 못난이죠."
다정다감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남자.
이 남자 유형 역시 여성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바라왔던 이상형들 중 하나 아니던가.
명쾌한 그녀의 발언에 무릎을 탁 쳤다.
'<강하다>라는 키워드가 항상 좋은 의미일까?' 하는 질문도 함께 던져본다. 그게 끌리는 사람도 있고, 안 끌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남자가 가져오는 먹이에 열광하는 여자도 있겠지만, 자기 스스로 작은 먹이라도 잡고 싶어하는, 앞선 사례의 지인 같은 여자도 있다.
이건 지극히 개인의 선택이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최선의 선택은 따로 있는 것이다. 작은 먹이라도 스스로 사냥하고픈 여자에게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리더십 성향이 강한 남자 행동은 답답할 수 있다.
반면 나에게 부족한 리더십을 상대가 발휘하면, 상대의 템포에 맞춰서 필요한 것들을 적절히 내조하는 것이 편한 여자도 존재한다. 이런 경우 우유부단하게 여자에게 선택지를 마냥 맡기려고 드는 남자가 답답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하고 우선시 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알파
나를 사랑하고 우선시하며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베타
나를 사랑하고 우선시해서 함께 모험을 즐길 줄 아는 감마
나를 사랑하고 우선시해서 때로는 혼자 있는 시간을 존중할 줄 아는 시그마 ]
세상 그 어떤 남자도, 여자도 단 하나의 유형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애초에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알파/베타라는 이분법적인 전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상황이 진심을 압도한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알파의 역할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때로는 베타로서 상사의 입장을 배려할 줄도 알아야 한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comfort zone을 확장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배려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 성향과 무관하게, 상황이 주어지만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상황에 필요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내가 지향하는 <온전한 인간>이며, 나는 나의 반려자로 이렇게 입체적인 사람을 꿈꾼다.
혹자는 물을 수 있다.
"그럼 Queen 나봄이
바라는 이상형은 누구인가요?"
앞서 말했던 '네가 진짜 원하는 남자는 어떤 사람이야?'라는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이상형대로 남자를 만날 확률이 그리 높진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알파 70%, 베타 20%, 감마 5%, 시그마 5%> 정도의 남자가 내게 가장 이상적이다.
[ 나는 큰 그림에서 <디테일>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다. 친구들과 조언을
주고 받는 과정이 힘드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내가 리더로서
큰 그림을 그릴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
그렇다. 나는 디테일에 강한, 삼국지의
제갈량처럼 <책사>에 훨씬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리더가 될 필요가 있을까?(ft. 소비뇽 블랑, 세미용) 中 ]
"나봄이 네가 남자였으면 난 너랑 결혼했을 거야."
사업하는 사장님 친구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이게 한 둘에게 듣는 게 아니라 (내 기억이 맞다면) 대략 10명에게 들었으니 내 성향은 확실히 리더쪽보다는 책사쪽이다.
이전 연애의 역사들을 되짚어봐도 전 남자친구들이 '나봄이에겐 항상 뒤를 맡길 수 있어 든든하다.'라는 말을 자주했던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서 싫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를 King으로 만들어 준 적이 있나요?(ft. 인맥 관리)>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인공이 절대 다수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조연이 빛난다. 왜냐하면 주인공보다 조연의 수가 훨씬 희소하니까. 주인공에게는 그들을 빛내줄, 대체불가능한 조연이 꼭 필요하니까.
더군다나 나는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가 가장으로서의 아빠의 지위를 확고부동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장했고 그게 여전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아빠는 우리 집 기둥이야. 바깥에서 힘들게 일하고 오시는 거잖아? 당연히 돌아오시면 현관에 서서 인사드리는게 예의야.'라는 엄마의 가르침은 31살인 지금도 유효하다.
화목한 가정을 꾸리시는 우리 부모님을 관찰해보면 한 가정이 온전히 잘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사람과 리더의 방향에 맞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비유하자면 동굴을 지킬 자와 도끼 들고 사냥 나갈 자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 부모님의 사례로 비춰보면 우리 아빠는 전형적인 리더 타입(도끼 들고 사냥 나가는 자)이시고, 우리 엄마는 책사 타입(동굴을 지키는 자)이시다. 서로의 성향과 지위를 존중하기 때문에 30년이 넘는 부부 생활을 평화롭게 유지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집안 분위기(결혼할 때 가정 환경도 중요하니까)와 내 성향을 고려할 때 내 이상형에서 알파 기질은 대략 70%의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면 된다.
내가 싫어하는 남성상들 중 하나가 '어줍잖은 마초 기질 발휘한다고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남자'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감 능력을 가진 남자', 즉, 앞에서 정의한 베타 기질의 성향도 내 남자에게는 필요하다. 전체 성향에서 20% 정도면 충분히 타협 가능한 수치다.
나는 다방면에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기에 기왕이면 함께 해주면 고맙다. 모든 일을 다 함께 할 수는 없겠지만 공통의 관심사에 한해서는 함께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감마 기질이 5% 정도 있으면 내 연애와 결혼 생활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더불어 나의 경우 <혼자서도 잘 노는 타입>이다.
굳이 남자와 모든 것을 함께 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명확하게 잘 알기 때문에 남자가 없다고 해도 그리 외로움을 타는 타입이 아니다(되려 전 남자친구들이 외로움을 호소하는 타입이었다).
오히려 나 역시 독립된 내 시간을 확보해 주지 않으면 답답해한다. 따로 또 같이. 이 모토가 내 연애 및 결혼 신조다. 그러니 시그마 기질도 5% 정도는 있으면 좋다.
물론 나 역시 이런 성향의 남자에게 부합할 수 있는 좋은 여자가 되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갈고 닦아야 할 것이고.
원래 쌍방 노력 없이는 좋은 관계 유지가 불가능하다.
내가 영 앤 리치, 톨 앤 핸섬을 바란다면, 나 역시 영 앤 리치, 프리티 앤 섹시가 되어야 하지 았겠는가?
와인 애호가들에게 '죽을 때까지 단 한 종류의 와인만 마셔야 한다면 어떤 와인을 선택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대체로 <피노 누아>를 이야기한다.
얇은 껍질 탓에 투명하게 빛나는 레드 와인을 만들어내는 피노 누아는 높은 산도와 낮은 탄닌, 붉은 과일 풍미(레드체리, 딸기, 라즈베리)를 섬세하게 표현할 줄 아는 포도 품종이다.
피노누아는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지라고 불리는 프랑스 부르고뉴, 황금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코트 도르의 코트 드 뉘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최고로 친다. 우리가 잘 아는, 좋은 빈티지는 수천 만원을 호가하는 로마네 콩티가 바로 피노 누아로 만들어진 와인이다.
(로마네 콩티는 단독 판매를 하지 않는다. 로마네 콩티를 포함한 12병의 와인들이 들어있는 세트를
구입해야 한다. 한국의 공식 수입사는 신동와인으로 연간 20세트 정도가 한국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대중들이 이 세트를 볼 수 있느냐 하면 확률적으로 희박하다. 왜냐하면 대기업 회장님들이 입도선매식으로 미리 예약해서 사가시기 때문. 만약 와인샵에서 단품으로 발견했다면 직수입이 아니라 그레이 수입 루트로 들어왔을 확률이 높다. 딜러가 세트를 해체해서 별도 판매하는 경우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막상 피노누아로 만든 와인을 맛보면 '별로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뭔가 와인스럽지 않은, 물 같은 느낌이 그다지 당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스페인의 템프라니요, 호주의 쉬라즈, 이탈리아의 네비올로 같이 파워풀한 와인을 선호하기도 한다.
스페인의 템프라니요,
호주의 쉬라즈,
이탈리아의 네비올로.
이 와인들이 피노누아로 만든 와인보다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진 개성이 명확히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포도 품종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중간하게 만들어진 피노 누아 와인은 올드바인 호주 쉬라즈를 이기기 어렵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만든 페트뤼스, 샤토 뒤켐 같은 와인들 역시 피노 누아로 만든 와인의 호적수가 될 수 있다. 와인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만큼의 절대적인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맛있는 품종이, 누군가에겐 별로일 수 있다.
반면 누군가에게 세상에 다시 없을 최고의 품종이라도 내게 있어 별로인 품종일 수도 있다.
사람도 똑같다.
누군가에겐 알파남이 세상에 다시 없을 최고의 남자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판단해야 한다.
"나의 입맛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래서 나의 일생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와인 품종은 무엇인가?"
※ 이번 글은 지극히 Queen 나봄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반박을 하시고 싶은 욕구가 1이라도 드신다면 조용히 뒤로 가기 눌러주시길, 매우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옳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