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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een 나봄 Jul 21. 2023

와인용 포도는 양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난 후회하지 않아, 엄마"(ft. 만약에-태연)

저녁 10시 32분.

WSET(국제와인자격증) 공부를 하다가 두통이 생겨서 잠시 침대에 누워있는데 익숙한 벨소리가 들렸다. 뻑뻑해진 눈을 양손으로 쓸어내리며 여전히 무질서하게 머리를 자극하는 통증을 갈음해봤다. 



"공주야, 자니?"



야심한 시각임에도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명랑했다. 뒷목까지 잡아끄는 통증에도 베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일어나서 자세를 고쳐잡았다. 옆에 있는 복길이(Queen 나봄 수면용 인형)를 끌어안고 상냥한 목소리의 족적을 쫓아갔다. 




한참 혼자서 악몽을 꾸던 시절에         아빠께서 사주신 인형, 복길이                복이 길게길게 이어지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          




"아니~ 공부하다가 머리 아파서 쉬는 중!"


"에휴, 너무 열심히 하지 말아! 엄마는 그런 공부보다 공주가 튼튼한 게 제일이야! 뉴스보다가 갑자기 옛날 생각나서 전화했어!"


"무슨 생각이 났는데?"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다 헤진 지갑 하나를 부여잡으며 아들, 딸 대학까지 보낸 엄마의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난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던 시절이었다. 



"대전 지하철 사업 예타 통과했다더라. 우리 공주가 00동에서 일할 때 2호선, 3호선이 생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취직을 해서 이제 어려운 집안 형편에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대구에서 대전으로 올라왔다. 당시에 직장 근처에 집을 구하려 했지만 여자 혼자 살기에 직장 근처 동네의 치안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출퇴근길로 다녔던 육교        겨울에 눈이 그대로 얼어버리면 위험천만한 빙판길이 됐다                                




더군다나 대전 시내로 나오기 위해서는 버스로 1시간 30분, 택시비만 2~3만원이 나오는 거리였다. 직장 근처에 터를 잡는 순간 정말 시내의 최신 동향에서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고향도 아닌, 타지에 혼자 사는 2030 여성에게 지역의 주류 집단과 거리를 두는 것은 고립되는 지름길이다. 지역 부동산의 정보를 알아보는 일도, 좋은 인맥을 형성하는 것도 지역의 중심가에 연을 두고 살지 않으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출처 : 데일리굿뉴스




물론 인터넷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알짜배기 정보들은 오프라인에서, 인맥을 타고 알음알음 전파된다는 것은 26살 나봄도, 현재의 우리 모두도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선택해야 했다.


직장에서 조금 떨어졌지만, 30분 거리의, 치안이 그나마 괜찮은 동네에서 살 것인가? 

지하철, 기차를 타고 왕복 3시간을 출근하는 한이 있어도 중심가 근처에 살 것인가? 










후자를 선택했기에 그 이후로 내 생활은 매일매일이 체력과의 싸움이었다. 낮에는 직장에서 치열하게 업무를 처리하고(앤트리치님이 직업 활동은 3D 활동이라고 하신 이야기가 딱 맞다), 밤에는 의뢰를 받은 강의를 하러, 괜찮은 인맥을 소개 받기 위해 모임에 참석했다.




지각은 금물이었다.

7시 21분 기차를 타기 위해 무조건 5~6시 사이에 일어나야 했다. 너무 힘들어서 늦잠을 잔 날에는 택시비로 2만 원이나 내야 했다. 


여름에는 백팩끈이 얇은 옷을 뚫고 생살을 파고 들어 아팠다. 겨울 눈이 그대로 얼어버린 날엔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냉기를 각오하고 육교의 철난간을 부여잡았다. 그러면 적어도 눈이 꽁꽁 얼어붙은 계단에서 구르는 건 예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너무 아파 쓰러져 기차 철로 아래로 굴러떨어진 적도 있었다. 승무원이 기차를 멈춰세우지 않았으면 아찔할 뻔한 순간이었다. 


출퇴근에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자기계발에 매진해도 늘 에너지가 부족해 기운이 없었다. 운동을 해도 근본적인 피로가 풀리지 않으니 쉽게 체력이 붙질 않았다. 

-테슬라 모델X : "드림카로 누나의 꿈에 날개를 달아줄게"라고 말하는 동생이 있어 가슴 뭉클하던 날 ]





"그러게, 엄마. 며칠 전에 00동에 간다고 레이디(Queen 나봄 차 이름) 끌고 갔는데 지하철이랑 기차로는 1시간 30분 걸리는 거리가 저녁 늦은 시간에는 22분이면 가더라."



나긋하게 전하는 말에 목이 막히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휴, 또 우신다. 또.




아마 우리 엄마는 70, 80살이 되어도 계속 내게        미안하다고 하실 거 같다. 전혀 그러실 필요가 없는데. 




"우리 공주가, 그때,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그래서 많이 아팠나 봐. 그래서 이렇게 병이 났나 봐. 그때 엄마도 많이 아파서. 엄마는, 엄마는, 그게-"


"전혀 미안해 할 필요가 없어요. 그땐 다들 힘들었어~ 그래도 그때 힘들었으니까 지금은 먹고 살만하지! 그거 알아, 엄마? 나 요즘 미모가 물 올랐다는 소리 엄청 들어!"


"우리 공주는 원래 예뻤어."




지인과 만남 중 찍은 사진        이렇게 귀한 사진을 찍어주시다니, 감사할 따름♥                                




최근에 아는 지인의 사업 아이디어에 대한 조언을 하러 갔다가 찍은 사진들을 카톡으로 보냈다. 지인이 '나봄님 덕분에 사업이 탄탄대로라고, 앞으로도 많이 조언해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를 전하며 엄마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귀엽게 봐주세요~ 원래 부모 앞에서 자식은 때때로 화려한 날개를 자랑하는 공작새가 되어야 하거든요)



"봐봐, 그때 고생 안 했으면 이렇게 좋은 인맥도 못 만났을 거야! 역시 재테크 중에 최고봉은 몸테크야!"


"차라리 그때 집에 돈 부치지 말고 차라도 한 대 사지. 그러면 이렇게 아프고 힘들지 않았을 텐데."








<만약에>

지나간 과거는 다시 살 수 없기에 만들어진 단어다. 사람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 자신이 했던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제가 요즘 이렇습니다ㅎㅎ저점일 때 샀어야 했는데!!출처 : 한국경제



귀엽게는(사실 살벌하다) '그때 애플이랑 테슬라를 샀어야 했는데'와 같은 '껄무새 버전'에서 '그때 그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됐는데.'와 같은 '애틋함'까지. 




정말 힘들 때는 '만약'이라는 가정 하에 잠시 현실에서 회피할 때가 있다. 힘든 현실을 잠시 잊고, 과거의 내가 조금 더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고민해보는 거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을 지향하기에 이루어지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다. 




오죽하면 노래로도 '만약에'가 나왔겠어요^_^출처 : 비긴어게인




나 역시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때때로 <만약에>라는 단어의 힘을 빌릴 때가 있다. 




만약에 내가 간다면 

내가 다가간다면

넌 어떻게 생각할까

용기낼 수 없고


만약에 니가 간다면 

니가 떠나간다면

널 어떻게 보내야 할지 

자꾸 겁이 나는걸


내가 바보같아서

바라볼 수밖에만 없는 건 아마도

외면할지도 모를 니 마음과 

또 그래서 더 멀어질 사이가 될까봐

-태연 '만약에' 中




"그때 내 몸이 좀 더 편하게 

차를 샀다면 어땠을까?"


"그때 가족들을 조금 외면하고 

내가 좀 더 편하게 사는 방법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때 눈 꼭 감고 돈만 보고 

결혼했다면 우리 집이 좀 더 편했을까?"



<만약에>라는 돌이 수면 위에 잔잔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때때로 그 파동은 후회와 아쉬움의 메시지를 내게 건낸다. <만약에>라는 질문이 만들어낸 파동을 손끝으로 느끼며 다시 또 물어본다. 



"넌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니?"




이미 수십, 수백, 수천 번 반복된 질문이다. 

지나간 시간들, 그 안에서 내가 놓치거나 포기한 선택지들이 거친 강물의 흐름을 따라 휩쓸려나갔다. 인간적으로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나도 사람인데 편한 길을 두고 힘든 길을 돌아나가는 것이 마냥 기꺼웠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택에 있어서 후회하느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26살, 27살, 28살, 그리고 31살.

그때의 내가 정말 치열한 고민을 한 끝에 최선을 다해서 내린 결정임을 알기 때문에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후회한다면 어린 날의 내가 했던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31살의 시점에서 어린 날의 내가 '조금 더' 현명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출처 : pinterest




내가 어린 날의 나보다 현명한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이미 나는 성장한 것이다. 나의 성장에 박수를 쳐줘도 모자랄 판에 후회라는 감정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이 어디있는가? 




"엄마,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엄마도, 나도, 우리 모두도.


그 시절을 후회하지 말고 

멋지게 성장하고 있는

우리를 응원하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먹는 포도와 달리, 와인용 포도는 굉장히 척박한 토지에서 기른다. 발로 즈려 밟으면 수분기 하나 없는, 건조한 흙먼지만 가득 흩뿌려지는 포도밭이 최고급 와인용 포도를 생산하는 와이너리의 진실이다. 




이런 포도밭에서 와인용 포도를 길러야 하는 이유는 와인에 복합적인 풍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기름진 땅에서는 포도 나무가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지 않는다. 곁가지로만 뻗어도 생명 유지에 필요한 물과 양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거 아세요?포도나무가 60년 이상 살 수 있다는 거?얘네 생각보다 생명력 질긴 편입니다 :D이러니까 사람이랑 더 비슷해보이지 않나요?출처 : 오마이뉴스




하지만 척박한 곳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포도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뿌리를 지하로, 또 지하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지하에 흐르는 물과 양질의 양분을 섭취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로마네 콩티처럼, 심한 경우는 4톤 트럭을 끌고 와도 포도 나무 하나를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출처 : 오미나라




뿌리는 지하로 뻗어나가면서 지층별에 포진되어 있는 다양한 미네랄을 포도에 전달한다. 다양한 미네랄을 한껏 머금은 포도로 만든 와인은 최대 3차향까지 복합적인 풍미를 뽐낼 수 있다. 단조로운 것보다 변칙적인 것을 선호하는 와인의 세계에서 이런 와인은 최고급으로 친다. 




출처 : pixabay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유복한 곳에서 어린 시절 다양한 경험을 하며 안락하게 성장하면 최상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내가 태어날 가정과 부모형제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포도밭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최대한 뿌리를 지하 깊숙이 내려서,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강렬한 햇살에 입 안이 바짝 말라가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 




기왕 이럴 거면 보르도 5대 샤토 중 하나인 샤토 마고나 샤토 무통 로칠드처럼 프리미엄 와이너리로 만들어야죠




솔직히 고생하는 거 딱 질색이다.

최대한 편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편한 것만 좇다가 꼭 사고가 나더라. 때때로 힘들더라도 옳은 길, 내 마음이 편한 길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경험들이 하나, 둘 쌓여간다. 나를 이루는 풍미들이 차곡차곡 층을 이루며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복합적인 매력을 발산할 수 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때로는 온몸을 부딪쳐 배우고 익힌, 나만의 삶의 노하우가 오늘의 나를 살게 한다. 




출처 : 짤봇




단조로운 것보다는 예측 불허의, 다양한 매력이 훨씬 재미있지 않은가? 그런 매력들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숙성의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명품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 그래서 엄마-




"난 그때의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 시절을 잘 이겨낸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눈물 대신 박수로 인사하자. 잘 견뎌냈다고. 그래서 대견하다고. 









누군가 여왕에게 '여왕님께서 이룬, 가장 가치 있는 성취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여왕은 이렇게 대답하겠다.




"지금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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