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함께 사는 반려인 어리와 오랜만에 ‘출장’을 다녀왔다. 우리끼리 이름 붙인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2인조 출장 수리단’이 이번엔 수리가 아닌 짐 정리를 하고 왔다.
어리와 나는 가끔 가까운 지인에 한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출장을 떠난다. 우리는 살림살이도 정리하고, 가구도 재배치하고, 수전이나 전등, 문 손잡이, 보조키 등도 교체하고, 페인트칠도 하고, 집 구석구석 살펴 보수하고 온다.
사실 이번엔 출장을 목적으로 떠난 건 아니었다. 지난달에 출간한 나의 책 <친구를 입양했습니다> 속에 등장하기도 했던 비구니 스님께 책을 직접 가져다 드리려고 방문한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2박 3일을 머물며 스님의 짐 정리를 도와드리게 됐다. 혼자 장시간 운전해 다녀오는 것이 부담스러워 바쁜 어리에게 하루만 동행을 부탁했는데, 나 때문에 어리까지 꼬박 이틀간 짐 정리하느라 고생을 했다. 시간이 금인 친구인데 미안하다.
일 년 반 만에 방문한 스님 댁에는 전에 못 보던 도자기와 그림 액자, 미술품이 많이 생겼다. 스님은 코로나 이후 생계가 어려워진 예술인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그분들의 작품을 하나둘씩 구입하시다 보니 그림과 도자기 같은 짐이 늘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스님의 선한 마음을 이용하는 나쁜 사람들이 스님 주위에 모여들었고, 그중엔 스님을 속여 쓰레기 같은 물건들을 고가에 팔아넘긴 사기꾼도 있었다. 스님은 그렇게 정신없이 휘몰아친 1년 여가 지나고 보니 비싼 쓰레기 짐들과 빚만 남았다고 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나라도 막았을 텐데 스님을 좀 더 자주 찾아 뵐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스님은 예술품 말고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짐이 많았다. 사람이 환갑을 넘게 살면 자연적으로 짐이 많아지는 건가? 버리는 걸 못 하는 스님은 수십 년 간 온갖 물건을 쌓고 또 쌓아두셨다. 게다가 스님은 늘 남에게 베풀기 위해 물건을 구입하시고 음식을 잔뜩 해서 나누는 걸 좋아하신다. 누구라도 집에 오면 필요한 물건을 찾아 아낌없이 다 주시는 분이다. 그러다보니 본인에겐 필요없는 물건도 누군가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더 물건을 버리지 못하시는 듯하다. 줄곧 절에서 사시다가 십여 년 전 일 때문에 주택으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되면서 많은 짐을 줄이긴 하셨지만,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신 만큼 다시 또 십여 년 간 많은 짐이 쌓였다.
그렇게 새 물건을 들어오면 빈 공간을 찾아 채워 넣기를 반복하시다가 몇 달 전 정년퇴임을 하신 후엔 스님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생긴 듯했다. 전에는 “정리하고 싶긴 해도 다 사연 있는 물건들인데 버리기는 좀 그래” 하시던 분이 드디어 짐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수십 년 간 쌓아둔 짐들이 이제는 답답하기도 하고, 본인의 사후 남겨진 짐 처분에 대해서도 고민하시는 모양이다.
현재 스님의 건강 상태는 썩 좋지 못하다.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기 때문에 늘 피곤하고 휴식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시력마저 좋지 않은 데다, 이제는 옆에서 부축하지 않으면 걷는 것도 편치 않은 상황이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까지 밝게 만들 정도로 항상 천진하고 낙천적인 분이었는데, 그런 스님이 이젠 좀 지치셨는지 우울해 보여 마음이 짠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안부를 나누다가 스님이 “짐을 좀 정리하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난다”라고 하신 한 마디에 나는 어리와 짐 정리를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는 집을 보는 건 나에게 참 거슬리는 일이다. 다른 사람 집에 가서 정리되지 않은 걸 보면 내 집이 아니니 보통 외면하고 나오는 편이지만, 속으로는 정리하고 싶어 근질거린다. 집주인과 친밀감이 없거나 내 몸이 힘들고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그 정리 욕구를 꾹꾹 참아내는 것이다. 그동안 가끔 스님을 찾아뵐 때마다 저 수많은 짐에 묻혀 사는 스님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내어 정리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줄곧 외면했었다.
스님이라고 다 깔끔하게 정리를 잘하고 무소유를 실천하는 건 아니다. 스님도 사람인지라 정리를 못 하고 사는 스님도 있다. 또 스님들은 선물도 많이 받고 손님도 많이 치르다 보니 기본적으로 짐이 많다. 바로바로 정리해주지 않으면 금방 짐이 쌓이게 된다.
스님 댁에 작년 초에 방문했을 땐 하루종일 냉장고 정리를 했다. 혼자 사시지만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다 보니 냉장고엔 항상 음식이 가득했다. 사찰 음식을 만들던 분이고, 워낙 주위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나누는 걸 좋아하시니 3개의 냉장고 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음식들이 잔뜩 들어있다. 뿐만 아니라 상온에도 온갖 발효음식과 식재료가 가득하다. 냉장고를 정리하면서 칸칸이 들어갈 식재료와 음식을 구분한 이름표를 문에 부착해 놓으니 냉장고에 뭐가 들어있는지 한눈에 보여 앞으로는 이대로만 정리하고 살면 되겠다며 스님이 너무 좋아하셨다.
정리 도중에 스님이 다른 공간에 임시로 가져다 둔 짐을 가지러 갔다가 만난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시길래 그동안 옆에서 스님한테 짐 정리 좀 하시라 말씀드릴 땐 안 듣던 스님이 마음을 바꾸신 거냐”라고 물었다. 스님한테는 옆에서 짐 좀 정리하시라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정리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건데, 자주 왕래하신다면서 좀 알아채 주고 도와주셨으면 좋을 텐데 좀 아쉬웠다.그 불편함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아마 그분들도 엄두가 나지 않았을 거다. 스님의 살림살이를 정리하는 게 조심스럽기도 할 것이고. 정작 스님도 짐을 정리하고 싶어도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막막해 계속 미뤄두셨던 것 같다. 편하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진작에 하셨을 텐데... 사실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마음을 내어 함께 짐 정리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암자에서 두세 달 스님과 함께 살았던 십여 년 전에도 나의 정리벽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암자에 들어간 다음날, 스님이 추운 방에서 불편하게 생활하시는 걸 보고 바로 살림살이를 옮겨 방을 바꿔드렸다. 그리고 절 식구들과 큰 가구를 옮기고 짐들을 정리했다. 그때의 기억이 스님에게는 인상 깊었는지 ‘서란=정리 잘하는 애’로 인식되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스님을 어려워하는 신도들과 다르게 스님들을 스스럼없이 대하고, 스님들도 날 편하게 대하는 편이다.
스님 짐을 정리하면서 달항아리를 얻어왔다. 아무런 문양이 없는 순백의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은서란
가구 재배치와 용도별 정리만으로도 절반의 정리 효과
현관 입구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걸려있는 파노라마 대형 그림이 좌우 양쪽 방 문틀에 걸쳐져 답답해 보여 그 자리엔 원형 액자를 걸고, 대형 그림은 현관 오른쪽 넓은 벽에 걸었다.
먼지가 쌓이기 쉬운 유리로 된 거실 TV 오픈 장식장은 버리고, 손님방에 있던 수납 가능한 원목 서랍장으로 교체했다. 나무 벽면과 조화롭게 잘 어울리고 밖에 나와 있던 짐이 수납장 안으로 들어가니 한결 깔끔해졌다. 거실에는 TV와 TV장, 소파테이블, 소파만 배치해 공간에 여유를 두었다.
거실 TV 옆에 있던 검은색의 원목 뒤주와 거실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었던 소파 옆 원목 장식장은 모두 손님방1로 이동해 나란히 붙여두고 작은 백자 도자기 하나씩만 포인트로 올려두었다. 색상과 재질이 같은 가구를 나란히 배치하니 거실에 있을 땐 칙칙하기만 했던 가구가 본래의 고급스러운 느낌이 되살아났다.
손님방2에 있던 작은 소파와 의자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어 당근마켓에 무료 나눔으로 올렸더니 바로 필요한 분이 나타나 가져가셨다. 그렇게 손님방 2개가 깔끔해졌다.
집을 정리할 땐 일단 덩치 큰 가구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론 가구 재배치만으로도 정리된 것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가구가 자리를 잡은 후엔 그 안에 각 공간의 쓰임에 맞게 짐들을 정리하고, 불필요한 짐들을 버리면 된다.
가구를 배치하고 그 안에 자잘한 짐들을 정리해 채워 넣었다. 거실과 손님방 2개를 정리했지만, 남은 ‘차방’이 문제였다. 차방에는 돌로 된 불상과 도자기,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수많은 다기, 보이차, 책, 냉장고까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원목 수납장에 안 쓰는 물건들과 보이차, 미사용 다기세트 등 선물할 수 있는 물건들을 넣고, 벽면 장에는 다기용품들을 용도별, 색깔별로 구분해 정리해 두었다. 그림 액자들은 빛을 보지 않도록 한쪽 벽면에 세워 두고, 거실에서 옮겨온 붉은색 도자기 십여 점은 곧 집에서 나갈 것들이라 차방 베란다에 놓고 천을 덮어 두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작은 짐들까지 하나하나 용도별로 구분하고 차근차근 정리했을 텐데, 이틀간 굵직굵직한 짐들만 정리하고 스님방과 주방은 손도 대지 못했다. 스님은 지금 정리된 것만 해도 집이 대변신했다고 너무 좋다고 하셨지만, 내가 보기엔 30% 정도밖에 안 한 것 같아 마음이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스님은 내내 미안해하고 고마워하셨다. 앞으로는 물건을 새로 들이는 일 없이 이대로 유지하겠다고 하시면서.
짐 정리를 하기 전 스님께 꼭 필요한 물건, 꼭 필요하진 않지만 소장하고 싶은 물건, 불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여쭤봤다. 스님은 지금 가진 물건 전부 다 없어도 괜찮다고 하셨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다고. 필요한 거 있으면 다 가져가라고. 그럼 왜 그동안 안 버리고 끌어안고 계셨냐고 다시 물으니, 스님은 그냥 그것들이 거기 있는 게 불편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비슷한 경험을 종종 한다. 정리되지 않아 어지럽고 지저분한 것이 나에겐 한없이 거슬리고 불편한 일인데, 그게 신경조차 쓰이지 않고 문제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바로잡아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나는 가끔 그런 사람들이 부럽다. 저렇게 둥글둥글 살면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고 참 편할 텐데 나는 왜 그게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