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은 상대방의 '결여'를 기어코 확인시켜 주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드라마나 영화에선, 이야기 전개를 위한 '필연적 시련'을 겪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리고 주변인들은 낙담하는 주인공을 보고 꼭 한 마디씩 한다. 주인공이 하는 말은 뻔하다. "동정하지 마"나 "네가 뭔데 나를 동정해"와 같은 뾰족한 대사다.
측은지심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전에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나온다. 이는 바람직한 마음이다. 동정의 출발도 분명 '바람직함'일 텐데, 왜 동정은 거부감이 들까? 왜 우린 동정을 나쁘다고 말할까? 의문이 들었고, 두 가지 이유를 찾았다.
동정이란 무엇인가? 동정은 '상대방의 결여를 상기시켜 주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딱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무언가의 결여다.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는 이유는 '재화'가 없어서고, 고아를 동정하는 이유는 '부모'가 없기 때문이다.
OMR을 밀려 써서 시험이 망친 친구를 동정하는 이유는 '점수'가 부족할 것으로 여겨서이다. 스스로 삶을 끊어낸 사람들에게도 우린 쉽게 동정한다. 아마 그들에게 더 이상 '삶'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동정, 측은지심, 불쌍함이란 형태는 상대의 결여된 처지에서 나온다. 이처럼 동정은 대상의 '결여'를 전제한다.
이번에는 한번 동정을 입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그는 누군가가 본인을 동정한다는 느낌이 들면, 스스로 가지고 있던 '결여'가 상기될 것이다. 그렇다. 동정의 원인을 찾게 된다. 타인의 동정은 자신의 결여를 떠올리게 하는 계기이자, 신호이자, 방아쇠가 된다. 즉 동정은 누군가의 약점, 부정적인 상황이나 상태, 불행, 어쩌면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고아에게 불쌍하다고 말하면, 그 아이는 다시금 자신이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교통사고를 당한 이에게 불쌍하다고 하면, 그는 다시금 팔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렇게 동정은 상대방의 결여를 기어이 확인시켜 주는 일이다. 그것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말이다.
누구나 꺼내고 싶지 않은 일이 있고, 기억이 있다. 어쩌면 잊고 싶은 일일 수 있고, 감추고 싶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애써 외면하고 있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동정을 끼워 붓는 순간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마치 아물고 있는 상처에 애써 앉은 딱지를 손톱으로 떼어버리는 격이랄까.
동정이 불순한 두 번째 이유는 동정이 만드는 우위 때문이다. 앞서 동정은 무언가의 결여로 인해 발생한다고 밝혔다. 이는 '너는 없지만 나는 있다'라는 구조를 형성한다. 여기서 자연스레 상하관계가 만들어진다. 결여는 우위를 낳는다. 상대적으로 더 낫고, 덜 낫고의 맥락을 만든다.
대개 우리가 마음 놓고 타인을 불쌍하다고 여길 때를 생각해 보자. 나한테 있는 무언가가 동정이 향한 대상에겐 없을 때가 아닌가? 그 무언가는 음식일 수도, 일상일 수도, 권리일 수도, 신체의 일부일 수도 있다. 동정은 상대의 결여를 상기함과 동시에, 동정의 주체가 상대적 우위를 점하도록 하는 행위이다.
예전엔 나의 동정은 순수하다고 여겼다.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을 상기시키겠다거나,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순수함과 선함은 같지 않다. 의도에 악의가 없다고 해도,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상처를 입는다면 그건 폭력이라 부르기에 손색없다. 동정은 상처 위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상처를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무릎 꿇게 만든다. 받는 사람이 아프다. 그래서 동정은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