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대한 이야기를 늘 감추고 싶었던 이유
해당 콘텐츠는 바른생각 공식 서포터즈 '띵커스' 활동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성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일은 금기시된다. 수치스럽고 어딘가 불편하다. 여기서 말하는 '성에 대한 이야기'라 함은 성희롱, 유머나 음담패설이 아니다. 그런 말들은 오히려 쉽다. 우리가 낯설어 하는 건 바로 성과 관련한 생산적인 대화다. 이러한 대화는 특히 연인 관계에서 필요하지만, 때로는 가장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영역이 되기도 한다.
성은 언제부터 부끄러워졌을까? 다음과 같은 주제로 연인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는지 떠올려보면 좋겠다. 어떤 자세일 때 자극이 더 잘 오는지, 자신의 성감대, 상대의 성감대는 어디인지, 관계를 하며 '오르가슴'을 느껴봤는지, 관계 시간은 적당한지, 애무는 적어도 어느 정도를 할애하면 좋겠는지. 이런 대화를 속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연인이 대한민국에서 몇 커플 정도 될까.
물론, 필자 역시 저런 이야기를 언제, 어떤 타이밍에 하면 좋을지 감이 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생각과 실전의 괴리를 이해한다. 다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그토록 '성'을 열어보지 않으려는 관습이 자리 잡았을까? 저런 주제의 대화는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시작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며, 서로가 서로를 더 존중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뭐가 그리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염려하면서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조차 처음부터 쳐다보지 않는 걸까. 여기서 부끄럽다는 감정 상태는, '감추고 싶다'라는 욕구를 일으킨다. 자신만 알고 있는 수치스러운 습관이나 실수를 들키고 싶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체면을 차리고 망신당하고 싶지 않아한다. 지금은 성도 꽁꽁 감추고 싶은 주제 중에 하나가 되었다.
어쩌다가 '성'이 그런 분야가 되었을까. 심리적으로 성을 감추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서는 '성'을 대하는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곰곰이 떠올려 봐야 한다. 잠시 중학교 2학년으로 돌아가보자. 사춘기가 막 진행되는 시기. 호르몬의 변화와 2차 성징이 발현되며, '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고 학교에서 배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적 호기심은 언제나 은밀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성을 접하며 느껴지는 감각은 흥분을 동반한 죄책감이다. 자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자위는 결코 누군가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하는 행위가 된다. 창피하고, 수치스럽고, 발각된다면 다시는 부모님 얼굴을 보지 못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방문을 틀어 잠그고 '몰래' 시간을 보낸다. 부모님의 명의로 '몰래' 성인인증을 하고, '몰래' 사이트에 들어가고, 그후에는 검색기록을 모두 지운다. 아무도 '몰라야' 하기 때문이다. 결코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 자신이 음란물을 보고, 자위를 하고, 사이트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누구한테도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다. '성에 대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성적 호기심을 해소하는 일련의 과정은 항상 비밀리에 벌어졌다.
잠시 생각해보면 미성년자가 성에 대해서 떳떳할 수 있는 순간이 있기나 했는가? 성에 대한 모든 콘텐츠는 19금이라는 철칙 아래, 그것을 보는 즉시 그들은 죄인이 된다. 사회적으로도 음란물은 근절하고 경계해야 하며, 부모들은 자식이 그런 데에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성적 호기심, 성에 대한 이야기, 성과 관련한 모든 것들을 숨겨야 한다. 그들은 언제나 성을 의혹이 제기되는 환경에서 '들키면 어쩌지'라는 경계와 각성 상태에서 성과 마주했다. 마치 남의 물건을 몰래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것과도 같은 죄책감을 '성'과 대면하며 겪었을지 모른다.
그런 사춘기, 미성년의 시기를 거친 이들은 예외없이 그런 과정을 거친 성인이 된다. 성인임에도 미성년 시절 얻은 성에 대한 인식과 태도, 성을 대하는 방식이 고착화되어버린다. 그 결과, 성을 숨기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성은 여전히 감춰야 할 것이다. '들키면 어쩌지?' 전전긍긍하는 중학교 2학년의 정서가 지금의 성인들에게 남아있다.
그런 청소년 시절을 거친 남성과 여성이 성인이 되어 만난다. 성생활을 이어가고 섹스를 한다. 이게 맞나 싶다. 어딘가 석연찮기도, 뭔가 변화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마치 중학교 2학년 아이가 부모에게 "나 오늘 방에서 자위했어요"라고 털어놓는 일을 상상할 수 없듯이. 그 정도의 금기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성의 영역에서만큼은 아직 중학생에 멈춰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성을 다루는 법이 미숙하다. 성을 마주하기가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이유는 성이 정말로 부끄럽고, 감춰야 할 게 아니라 어렸을 때 성을 대하며 죄책감을 느끼던 구조가 굳어진 것일 뿐이다. 성은 우리의 생각보다 창피스럽지도, 문란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어른에는 다양한 정의가 있다. 어쩌면 세상에 있는 성인의 수만큼 있을지 모른다. 그중에 하나는 어른이란 마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불편한 일, 힘들고 복잡한 일, 막중한 책임. 그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벗어나고 싶은 게 당연하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불편한 것은 피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들은 더 행하도록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순간 동반되는 두려움, 수치심, 불편함을 감내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용기를 지닌 사람을 어른이라 부른다.
성숙함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까? 어른이 꼭 되어야 할까? 그것에 대한 답은 본인에게 있을 것이다. 미성숙할지, 성숙할지, 머무를지, 나아갈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것. 환경에 의해서 굳어진 관습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성을 마주하는 일은 불편하지도, 두렵지도, 창피스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부단히 생산적이고, 재밌고, 서로를 더 존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지 않는 배려가 있음을 안다. 모른 척 넘어가고, 덮어주고, 신경 쓰지 않는 것. 충분히 아름답고 멋진 일이다. 다만, 그 배려하는 마음이 너무도 커서, '눈치'가 되고 있지는 않은 것인가? '외면'과 '체념'으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가? 배려는 존중에서 비롯되는 일이고, 존중이 결여된 배려는 더 이상 배려라고 부를 수 없다. 파트너가 기분이 상할까봐 연기하고, 적절히 반응하는 것. 혹은 관계가 끝나고 다짜고짜 "좋았어?"라고 묻는 것. 섹스 후의 대화는 이것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며,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성숙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