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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슷 May 23. 2024

J여행과 P여행을 둘 다 팝니다.

계획형 여행과 즉흥형 여행을 둘 다 팝니다. 

해가 넘어가서 21살이 되던 겨울, 그때 당시 친했던 친구들과 내일로를 떠났다. 5명이 함께하는 여행이고, 처음으로 일주일이나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기차 시간부터 버스 시간까지 거의 분단위로 계획을 세웠다. 모든 일정을 정해놓고 지키기로 약속해야 의견을 내다가 싸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조사하게 계획하고 가서 싸울 일은 없었지만 고단했다. 노는 것에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때 당시 나는 쌍꺼풀 풀로 쌍꺼풀을 만들고 다녔는데, 물속에서 아무리 놀아도 떨어지지 않던 쌍꺼풀이 힘들어서 붓기 시작하니까 여행 중반에는 풀리기도 했다. 만 19세였기에 소화했던 스케줄이었다. 내 인생 마지막 계획 여행이었달까.


그다음 연도에는 다른 친구와 1박 2일로 대구 여행을 갔었다. 그때도 나는 내일로 여행하던 습관이 있어서 계획을 빨리 짜고 싶었다. 기차표를 예매하려는데 친구가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빠른 기차 타고 가자는 거다. 아니, 어떻게 그런 여행이 있을 수 있지? 내 마음이 쫄려서 견디지 못하고 친구를 설득하고 설득해서 기차표와 숙소만 정했다. 친구가 이런 계획형 여행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대충 갈 곳만 정해두고 떠나는 여행이 처음인걸? 계획은 없었지만 싸우지도 않았고, 심지어 1박 2일 내내 먹으면서 잘 놀았다. 오... 계획하지 않아도 여행이 되는군? 


대구에 같이 갔던 친구와 그다음 해에 북미 40일 여행을 했다. 두 사람의 영혼이 바뀌었다. 계획형 인간은 친구가 되었다. 나는 뉴욕? 라이언킹 봐야지. 보스턴? 하버드대학교 가야지. 시카고? 시카고 피자 먹어야지. 밴쿠버?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 딴 곳. 말고는 별 생각이 없었다. 친구가 하자는 거 그냥 다 했다. 뭘 하든 그냥 여행 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좋았기 때문에 다 좋았다. 친구의 말을 빌리면 내 안의 계획형 인간은 대구에서 이미 죽었단다. 웃기고 미안했다. 


북미여행으로부터 1년 뒤, 나는 외가댁 대식구를 모시고 베트남 여행을 떠났다. 내가 가이드였다. 여행지 선정부터 일정과 예약까지 전부 내가 책임졌다. 해외여행 계획은 처음이었다. 숙소부터 음식까지 정하는 내내 혼자만의 외로운 사투였다. 새삼 아무 생각 없는 나를 데리고 다닌 친구들한테 너무 감사해졌다. 그 감사는 여행 중에 훨씬 더 커졌고 아주 진한 감동으로 느껴졌다. 여행에서 계획을 짜고 누군가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의 영역이었다. 심지어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의 기분까지도 나의 책임으로 느껴진다. 나는 가족 여행에서 내가 짠 계획에 누군가 투덜거리는 순간부터 힘이 푹푹 빠졌는데, 혹시 내가 투덜거린 적은 없었는지 반성했다. 투덜의 방향이 내가 아닌데도 그렇게 힘이 빠지는데,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 배웠다. 누군가의 여행 계획을 따라가는 사람의 미덕은 무조건적인 긍정뿐이라는 것을. 다행히 쫓아다니는 것에 꽤 재능이 있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안도했다. 


mbti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여행 다닐 때 계획형인지 즉흥형인지, 그러니까 J형 여행을 하는지 P형 여행을 하는지에 대한 소소한 논란이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닌다. 그저 재미로 가정된 상황일 수도 있겠지만 논란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서로에 대한 배려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여행을 즐기든지 함께 하기로 했으면 서로를 존중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상태를 적절한 방법으로 잘 전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는 그냥 잘 쫓아다니는 능력을 개발 중이다. 여행이면 뭘 해도 좋은 편인 사람이고, 여행지에 도착하면 신난다는 감정이 날 지배하므로 계획하는 능력보다 가망성 있는 능력이다. 나부터 먼저 내가 계획하지 않을 거면 무조건 웃으면서 쫓아가기, 계획한 여행이라면 상대방의 기분까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걸 꼭 명심해야겠다. 완벽하게 잘 맞는 여행메이트는 찾기 힘드니 꼭 지키자고 나한테 다시 한번 말해본다. 


아, 다 쓰고 보니 찔리네. 남미여행에서는 몸이 힘든 나머지 좀 투덜거렸던 것도 같아서 그 여행을 함께한 친구에게 미안해진다. 그 후에 멀어져서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꼭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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