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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슷 May 16. 2024

티 없이 맑았던 아이를 팝니다

해맑은 입국심사 '썰'

물리적으로 국경을 넘는 거야 육해공 어디든 가능하지만 우리는 입국심사를 받아야 합법적으로 그 나라에 체류할 수 있다. 오늘은 해외여행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것, 입・출국 심사 추억을 팔아본다.


보호자 없이 친구랑만 처음 해외에 나간 건 말레이시아 - 싱가포르 여행이었다. 보호자가 없는 건 처음이라 엄청 떨었는데 정말 물 흐르듯이 지나와서 기억도 안 난다. 겁쟁이 성격 어디 안 간다고 내가 무진장 떠니까 친구가 달래줬던 고마운 기억만 난다. 


그 여행이 끝난 이틀 뒤 바로 북미 여행이 시작됐다. 토론토가 그 여행의 첫 시작이었고, 밴쿠버를 경유해서 넘어가기로 했기에 입국심사는 밴쿠버에서 받았다.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는데 별일 없었던 입국심사를 생각하며 해맑게 심사대에 섰다. 30대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었고 정말 친절했다. 내 기억 속 대화를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이상하게 영어는 반말로 기억이 남으니 반말로 적는다.) 


"안녕~ 무슨 목적으로 왔어?"

"나 여행하러 왔어"

"혼자?"

"아니 친구랑!" 

"친구 어디에 있어?"

"토론토에"

"친구는 캐나다인이야?" 

"아니? 한국인인데?" 


이때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렇게 긴 입국심사는 처음이었고, 친절했던 심사관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길래 이상하다는 낌새만 눈치챘지만 영문은 몰랐다. 무엇보다 잘못한 일이 없었고, 기분 탓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웃고 있었다. 


"한국인인데 왜 캐나다에 있어?"

"친구 캐나다에서 일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심사관이 급기야 정색을 했다. 그래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고, 불법이 전혀 아닌데 도대체 왜 정색을 하는 건지 몰랐다. 심지어 4시간 후 바로 토론토행 비행기로 환승해야 했는데 1시간 지연으로 시간적 여유도 부족했다. 살면서 이렇게 긴 입국심사는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대화는 이어졌다. 


"친구가 캐나다에서 어떻게 일해? 학생이야?"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작년 11월에 와서 일했어, 한국과 캐나다 간 워킹홀리데이가 가능하니까 확인해 봐" 


그제야 표정이 긴장감이 좀 풀렸다. 속으로는 내가 확인해 보라고 명령조로 말했는데 왜 긴장이 풀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너 전공은 뭔데?"

"경영" 

"캐나다에서 일할 거야?" 

"아니 나 여행 왔고, (그레이하운드버스예약내역을 보여주며) 10일 뒤에 뉴욕으로 넘어갈 거야"

"알겠어" 


라는 대화 끝에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토론토에 도착해서 친구를 만나고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야 알았다. 관광비자로 와서 일하는 건 불법이기도 하고, 나처럼 동양의 어린 여자들이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상당히 예민하다는 거다. 심사관 잘못 걸렸으면 일 났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아마 내가 너무 당당하고 해맑고, 심지어 불법인 일도 없으니 잘 넘어간 거란다. 좀 알아보고 갈 걸 그랬나? 싶다가도 몰라서 그냥 사실만 당당하게 말하고 잘 통과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후 10일 뒤 토론토에서 뉴욕으로 버스를 타고 넘어갔다. 버스 시간은 밤 10시 30분. 잠은 무조건 잘 자야 하는 나는 오후에 2박 3일 퀘벡, 몬트리올, 오타와 여행을 하고 온 뒤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버스에 타자마자 기절해서 잘 생각뿐이었다. 세수도 하고 버스를 탔기에 계획대로 편하게 잠들었다. 달게 자는데 갑자기 버스의 불이 다 켜지더니 내리란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황당해서 친구를 쳐다보니까 입국심사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 캐리어까지 모든 짐을 다 들고 내려 쌀쌀한 공기를 마시며 입국 심사장으로 향했다. 잠결에 짜증만 났다. 


동행은 같이 심사를 받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다가 친구와 같이 심사를 받으러 갔다. 여행 목적과 일정을 물어보기에 친구가 다 대답을 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저 빨리 끝나서 잠이나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 마무리가 되려나 싶었는데 심사관이 "너는?"이라고 물었다. 순간 우리가 동행이라서 같이 심사를 받으면 같은 일정과 목적이겠지 뭘 또 나한테까지 물어보는지 졸린 마음에 짜증이 확 나서 "SAME"이라고 된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너무 짜증을 냈나 싶어서 말하자마자 놀라 친구를 보는데 친구의 눈도 토끼 눈이었다. 내가 그 자리를 좀 싸하게 만든 것 같았다. 속으로 반성하는데 심사관이 종이를 주며 나는 입국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마저도 잠결에 몇 개 틀리게 적어서 심사관이 고쳐주면서 함께 썼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심사관이 "내가 사람 잘못 본 건 아니지?"라고 나에게 묻기에 같이 웃었다. 미안했다. 


버스에 타자마자 나는 또 기절했다. 그다음 날 뉴욕에서 친구가 이야기하길 내 대답을 듣고 처음에 내가 미친 줄 알았단다. 분명 토론토 와서 캐나다 입국심사 이야기 하길래 미국은 더 빡빡하고 무섭다고 이야기를 해줬고, 그래서 여행 내내 떨더니 막상 가서 짜증을 내는 애가 도대체 제정신인지, 순간 싸해진 분위기에 철렁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짜증내서 죄송하고, 또 행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생각뿐이다. 너무 졸린 나머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그 후 반년 뒤 남미 여행 때 미국을 두 번 경유해야 했다. 미국은 경유라도 입국심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입국 심사장에 섰다. 이제는 그때처럼 실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바로 몇 시간 뒤에 환승을 해서 칠레로 가야 됐기에 마음도 편했다. 여행 일정을 묻더니 나한테 여행 비용은 얼마나 드냐고 물었다. 여행 경비를 묻는 질문은 처음이라 그때는 개인적인 질문인 줄 알았다. 그래서 친절하게 알려주려니까 한화로 300만 원이 미국은 얼마인지 헷갈리는 거다. 달러로 이야기해야 되냐고 묻고 머뭇거리자 친절하게 종이로 주면서 쓰라고 했다. 내가 쓴 숫자는 


3,000,000


심사관이 보더니 웃으면서 너 지금 한국 단위 쓴 거 아니야? 물었다. 창피해서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3,000달러 좀 안 되는 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 통과. 나중에 알고 보니 여행 경비도 생각보다 중요한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번째 행운이었다. 경유지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후로는 여행 잘 다니다가 일본, 오키나와에 간 날 입국 심사장에서 혼났다. 내가 여권에 마추픽추 도장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이걸 왜 찍었냐고 화를 냈다. 일본 가기 전 미국, 중국, 홍콩, 베트남 등 어떤 나라에서도 뭐라고 한 적이 없었고, 그때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권에 찍고 있길래 나도 찍은 건데 내가 갑자기 왜 타국에서 혼나야 하는 거지? 어이없었다. 


그리고 그 해 상하이로 여행 가려고 체크인을 하는데 무서운 말을 들었다. 여권에 있는 마추픽추 도장 때문에 입국 거절을 당해도 항공사 탓이 아니라는 종이에 사인을 하라는 거다. 내가 일본에서 혼난 것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 일본 심사관한테 미안함도 미안함인데 일단 이미 친구는 상하이에 가있고, 첫 휴가를 받아 가는 여행인데 출국이라니 어떻게 와야 하는지 감도 안 잡혔다. 무서워서 진짜 입국 거절 당하고 추방당하는 사람들이 있냐고 물으니, 최근에 그런 경우가 많아서 외교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단다. 일단 방법이 없으니 사인을 하고 출국 심사를 받고 면세품도 수령했다. 인터넷에 찾아보고서야 알았다. 여권에 낙서나, 개인 도장 등은 공문서훼손이라는 것을. 다행히 입국 거절 당하지는 않았지만 재작년 미국 가기 전에는 얼른 여권부터 다시 발급받았다. 


이제야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나니 요즘은 입국심사가 무섭다. 분명 나는 죄를 짓지 않았고, 않을 건데!! 관광목적으로 잠깐 방문하는 건데도 심장이 떨린다. 재작년 미국에 갔을 때는 코로나 끝물이라 준비해야 하는 서류도 많았지만, 해맑고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겁을 먹었다. 세컨더리룸을 간다 한들 잘못한 게 없으니 통과될 거고, 혹시나 오해가 생기면 (오해가 생길 일도 없을 테지만) 한국에 다시 돌아오면 된다. 물론 그 과정이 무섭겠지만 딱 그 정도의 일이라는 말이다. 입국심사 추억을 팔 때마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겁도 많아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도 몰랐어서 이렇게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썰'도 생겼으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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