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윤회에 관한 개인적 발견
시간.
삶.
죽음.
내 존재의 바탕화면과 잠금화면에 떠다니는 세 단어.
내 인생에서 흐르는 시간의 모습은 방향이 없거나 모든 방향이거나, 혹은 겹겹이 흐르는 그런 것이었다. 이를테면 내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이른 등교 후 아무도 없는 교실에 햇살이 하나 둘 자리 잡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갑자기 내가 사실 마흔임을 알게 되었다. 내 삶이 나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열여섯부터 다시 살아보라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마흔 살 영혼이 깃든 열여섯 소녀라니! 그날부터 나는 마흔의 나를 데리고 열여섯 살의 인간으로 매일 뜨고 지는 삶을 아껴 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정말 마흔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는 만큼의 삶과 죽음을 대면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막상 삶과 죽음이라는, 이 거창하고 밑도 끝도 없는 주제를 도대체 누구한테 물어본다는 말인가?
나는 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내 법계(法界)의 담당자가 달리 나 밖에 없었고, 나란 존재의 삶과 죽음을 나만큼 애틋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나 혼자 하는 것보다 내 안에 살아있는 지혜로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재밌을 것 같았다. 나는 이들을 내 친구 영혼이라 부르는데, 내 속에서 각자의 전성기를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만렙(滿-Level)급 인간들이다. 이들은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순간들을 함께 하며, 내 삶을 지금의 모습으로 함께 일구어 주었고, 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만큼이나 내 삶에 실재했다. 나는 내 삶의 기쁜 날들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했고, 힘든 날들은 내 친구 영혼들과 함께했다.
내 친구 영혼들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곳곳에도 함께 했는데, 그들에게는 아마 다른 모습으로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인간은 함께 있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각기 다른 서로의 모습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물질의 화학반응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나와 함께 했을 때 보여준 그들의 모습밖에 알 도리가 없다.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그저 '서로를 원하는 것'이었다. 친구 영혼인 우리는 서로를 원했기에 시간 없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몸과 영혼으로 몇 번이고 재밌게 살았고, 앞으로도 몇 번이고 그럴 예정이다.
우리는 재미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게 다 그냥 재밌자고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