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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Feb 03. 2024

이응 이야기




"선생님, 이응은 왜 건너뛰어요?"


"이응은 어렵다."


"이응이 제일 쉬워 보이는데요?"


"어려운 것들이 원래 쉬워보이는기라. 이응은 제일 마지막에 해주께."


"예에? 이응 지금 배우고 싶은데... 나 할 수 있는데...(온통 못 마땅)"


선생님은 껄껄 웃으셨다. 못마땅한 내 표정이 웃긴 모양이었다. 이응을 당장 못 배워서 안 그래도 애가 말라죽겠는데 선생님께서 크게 웃어버리자, 화인지 의욕인지 모를 내 속의 불덩어리는 기어코 내 두 볼에 불을 지폈다. 차가운 손등으로 볼을 번갈아 식혀가며 시옷을 쓰느라, 뿔난 마음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




원방각을 담은 모든 자음과, 천지인을 품은 모든 모음을 배우고 나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이응 가르쳐 주까?"


그때는 이응에 대한 갈망이 어느 정도 갈무리 됐을 무렵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자아가 비대한 편이었다.


"아니요. 이미 알아요."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선생님 앞에서 이응을 써 보였고, 선생님은 또 한참을 껄껄 웃으셨다. 이윽고 말없이 내 손에 있던 붓을 쥐시더니 올바른 이응 하나를 그려 내신 선생님.


"이제 알겠제? 이응 속에 얼마나 많은 각이 들어있는지. 그 각을 한 개도 안 놓치고 중봉中鋒으로 써내는 게 어렵기 때미로… 그래가지고 내가 마지막에 가르쳐 준다 캤지. 니 잘 되라꼬."


선생님의 이응을 가만 보니 그 속에 뼈가 있었고, 내 이응엔 그런 게 없었다.


중봉은 붓이 어딜 향하듯 붓 끝이 중앙을 향하도록 붓을 곧추세워 운필 한다. 붓 끝이 중앙에 있는 건 붓 결의 중심이 잘 잡혀있다는 것이고, 곧추세우는 것은 지면과 이상적 각도를 이루는 것이다. 붓 털들끼리 서로 조화를 이루며 몸은 하늘을 향해 곧추서있는 모습이 경천애인 敬天愛人을 닮았다.


"그리고 이응을 갖다가... 완전 동그랗게 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살짝 어그러 지더라도 니 이응을 써야 돼.  선생님 이응 봐봐, 여러 번 써도 어그러짐이 똑같잖아. 이건 내 이응이라서 그런기라. 근데 그 어그러짐이 과하면 안 되고, 적당히 내 건지 알아볼 정도로만 미묘-하게 있어야 돼. 알았제?"




운필運筆: 붓을 움직여 나감

운명運命: 명을 움직여 나감


이응은 어려운 게 맞았다.

아침에 이응 쓰다가 선생님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몇 자만 적어보았다. 사실 이응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을 정도로 많이 하셨는데, 무심코 하신 듯한 그 말씀 속에 살면서 자꾸만 생각나는 문장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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