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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Mar 28. 2024

안나의 계절

法悅




열망


파스타 소스를 잔뜩 만들었는데 면이 없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리조또로의 전향을 준비하던 중, 팬트리 구석에서 발견한 라자냐 파스타.


하나 꺼내서 쥐어보니 자꾸만 반대편 손바닥을 착착 때리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열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위댄스'가 생각난다. 그 친구들 노래 중에 '열망 하나 보고 가요. 그저 하고 싶다는'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랠 듣고 있자면


열망

그저

하고

싶다

모른다


의 순환이 프랙털을 그리며 번져 나간다. 물론 내 귀에 그렇다는 말이고 그들이 그런 의도로 썼을 리는 만무하다. 만무했으면 한다.


흥얼흥얼 솟아오른 열망에 힘입어 라자냐를 한 입 크기로 툭툭 부수기 시작했다. 적당한 두께감이 주는 손맛, 낙하하며 반구형 스테인리스 볼을 때리는 소리가 상상치 못한 쾌감을 일으켰다. 막판엔 더 부술 게 없어 조금 슬플 지경이었다.


끓는 물에 넣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자꾸만 짱짱한 라자냐. ‘아니, 뭐 이렇게 안 익어?' 하는 생각이 확 솟구치고 나서야 비로소 소스와 비벼져도 괜찮다는 신호를 건네받았다.


일본 크림시츄(크림스튜) 베이스에 샤프체다, 그뤼에르, 모차렐라가 혼연일체를 이룬 꾸덕한 소스에 라자냐를 넣고 휘적휘적하다 한 입 먹어 보았다. 찰기 있는 표면에 잘 스며든 꾸덕함이 입안 가득 채워지고, 코로 온갖 풍미가 새어 나오니,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나는 이런 확신을 빈번히 마주한다. 하나같이 새삼스럽고, 고유하며, 각자의 순간에 유효하다. 급히 한 숟가락 떠서 남편 이름을 부른다.


그의 얼굴에 같은 확신이 번진다. 콧김에서 분출되는 무지개 유니콘. 냉장고에 있던 식재료가 이렇게 찬란한 색으로 변하는 날이면 뿌듯한 마음이 든다. 가끔 요리를 망치는 날은 재료에 면목이 없어서 끝까지 먹는다. 원래 안 그랬는데, 그런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나의 생명은 다른 이의 죽음을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 연희는 나를 낳을 때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고 조금 죽었다. 그리고 나는 연희 닮은 만물들이 내어놓은 죽음을 냉장해 놓고, 매일 조금씩 꺼내 먹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꿈에 내가 좋아하는 철인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로 분주한 거실 안에서 그는 기다란 소파에 팔을 괘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한 마디 붙여보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경쟁자가 많았다. 언제 말을 걸어볼지 눈치를 살피며, 애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구나?"


그는 입으로 저렇게 말하면서 눈으로는 내가 할 말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 누구도 알 길 없는 나의 바닥을 쓰다듬으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거실에 시끄러우니까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할까?"


"(심장 터짐) 좋아요!"


"얘기하다 보면 배고파지니까, 테이블에 있는 음식도 챙겨가자!"


그렇게 우리는 양손 가득 음식을 챙겨 조용한 방으로 향했다. 대화를 시작하려는 찰나, 초대받지 않은 두 사람이 우리가 앉은자리에 동석했다.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계속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찌랑 할 말이 있으니까, 너네들은 나중에 얘기하자."


어색한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두 사람이 퇴장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이번엔 시끄럽게 떠드는 한 아이가 걸어 들어왔다. 좋아하는 철인을 독대할 수 있는 기회를 방해꾼들 때문에 놓칠 것만 같아 불안과 짜증이 몰려오던 찰나,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치고 지나갔다.


방해꾼은 항상 있다.

그들은 방해꾼이 아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철인의 눈을 직시하며, 첫 질문을 마음속으로 다듬었다. 그러자 시끄러운 아이가 있으되 없어졌다.


이런 꿈이 얻어걸리는 날은 하루종일 실실 웃게 된다. 거기 의미 따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몸에 남은 느낌이 너무 재밌는 것이다. 이걸로 당장 글을 몇 포대나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 그 상태가 아주 그냥 굉장히 고무적이고 계 탄 것 같은 느낌.



順天


"개기일식 보러 켄터키 갈래?"


"그래."


남편은 뜬금없는 제안을 잘하고, 나는 잘 따라나선다. 자꾸 이러다 팔순 잔치 할 때쯤이면,


"화성에 사막 트레킹 갈래?"


"그래."


될지도ㅋㅋ



안나의 계절에 꽃이 지고, 사과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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