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CCI May 13. 2024

만들기

그리고 안나




스테인리스


집에 있는 팬들이 죄다 스테인리스라 계란프라이를 못 먹은 지 오래되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스테인리스 팬과의 관계는 아직 공고하지 못한 탓에 수년간 의도치 않게 수란만 먹다가, 오늘은 계란프라이를 안 먹으면 병이 날 것 같았다.


뜻있는데 길 있다더니, 실행을 위한 합당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우리 집 밥솥 내부 용기에 하자가 있다며 아마존 고객센터를 통해 새로 받아 놓은 통인데, 안이 반들반들한 것이 오버이지(over-easy, 앞 뒷면을 기름에 살짝만 익힌 것, 제일 좋아함)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센터 전화하기가 귀찮아 죽겠는 나와는 다르게, 남편은 구매에 대한 정당한 권리 행사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편에 품은 채, 기름을 붓고 계란을 깨뜨려 떨어뜨렸다. 팬에 찰랑- 미끌리며 떨어지는 모양새는 내게 '뒤집기도 순탄할 거야~'라고 속삭였고, 예언대로 실행되었다. 예쁜 접시에 담아 젓가락으로 중심부를 살짝 터트린 후 가장자리에서 흰자를 조금 빌려와 노른자에 찍어 먹었다.


맛있다.

한 입 먹고 냉장고로 달려가 남아있는 계란의 개수를 확인해 본다. 20개 정도 있다. 안도의 날숨을 뱉은 후 접시에 놓인 계란프라이를 현전적 방식으로 먹어 치운다. 몇 년 만에 먹으니 새 맛이 난다.


프라이용 미니팬을 살 수도 있지만, 집에 팬이 이미 많은데 더 사면 기분이 나빠지므로 향후 수년간은 이런 식으로 계란프라이를 먹을 예정이다. 나는 빼빼 말랐지만 먹는 걸 좋아한다. 복부가 납작해서 많이는 못 먹는 게 애통할 따름.


계란 먹고 신나서 남편이 만들어 달라고 했던 공책을 만들어 줬다. 일본 사람이니까 일본말로 이름 적어줬다. 이자까야 메뉴판 같기도 하지만 그냥 이름이다. 남편이 낙관도 찍어 달라고 해서 빨간색으로 찍어주니 아까워서 못 쓰겠다고 웃었다.


요즘 공책 만들기에 빠져있다. 머리 쓰는 작업으로 과열되어 있을 때 공책을 만들면 머리의 열기가 아래로 내려간다.


단면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채소들의 단면을 맘껏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에 히아신스 폈는데 배추 미모에 밀림.


안나


안나가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이지만 아직 솜털이 보송하다. 다음 주에 가면 왠지 주인이 수확하고 없을 것 같아 이제 안나 보러 가지 않기로 다짐하고, 물끄러미 혼자 보면서 이별했다. 이별의 '이'가 '여'로 읽히면 '달라붙다'가 되는데, 안나 보던 마음이 이제 어디 달라붙을지 모르겠다.


우리 안나 잘 컸네.




금요일 연재
이전 05화 안나는 잘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