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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트와 매실청

두루두루

by ACCIGRAPHY





아마존으로 립틴트를 하나 샀는데 막상 받아보니 색깔이 크레파스 같은 거야. 사람 얼굴이 무슨 도화지도 아니고 정말 피부에 대한 이해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만들었구나 싶어서 허허 참 어이없는 손놀림으로 고개를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입술에 톡 찍으며 '이래서 아마존으로 화장품 사면 안 돼' 중얼중얼 거울을 봤는데,


세상에, 완전 피부에 착 감기면서 내가 결제 클릭을 했을 때 기대한 색감이 눈앞에 연출되는 게 아니겠어? 이쯤 되니 하나만 산 게 원통할 지경. 인간 피부와 제품의 발색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그것도 인종별로 차근차근 마친 사람이 만든 제품이었지. '이래서 립스틱은 발라봐야 알지' 내가 오해했다 미안하다 재빨리 사과했어. 나는 태세전환이 빠른 삶을 추구하거든. 물의 움직임에서 배웠어.


그래서 내가 이 얘기를 왜 꺼냈냐면 내가 사실 성격이 별로 안 좋아서 두루두루 사람을 잘 못 사귀는 편인데 - 물론 마흔 넘으니 겉으론 두루두루, 속까지 두루두루는 아님 - 이번에 내가 거의 한 10년을 보고 지낸 친구 중에 속으로 별로 두루두루가 안 되던 친구가 있었는데, 장시간 먹고 자며 논 건 이번이 처음이었거든?


2박 3일 같이 먹고 자면서 겪어 보니까 아마존 립틴트 같은 사람이었던 거야. 그래서 허허 참 가까이 겪어 보지도 않고 내가 그동안 이 사람을 정죄했구나 싶어서 같이 놀면서 속으로 자꾸 부끄럽고 미안했어. 이 친구는 이미 예전부터 속으로도 나를 두루두루 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더욱.


그래서 드디어 이 친구와 겉과 속이 두루두루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어떤 의식을 치르고 싶었어. 이 친구를 패들보드 앞에 태우고 뒤에는 원래 내 절친을 태우고 맘모스레이크를 휘휘 돌아다녔는데, 다 큰 성인 여성을 앞 뒤로 태우고 노를 저으니까 힘들어 죽겠는 거야. 와중에 미국 사람들은 스몰토크 좋아하니까 그것도 참여해 가며 패들링 하려니 죽을 맛이야.


그런데 그냥 좋았어. 왜, 사람들이 그러잖아. 살면서 진정한 친구 한 두 명이면 족하다고. 나는 잘 모르겠어. 인간 사이의 우정은 깊으면 깊은 대로, 얕으면 얕은 대로의 맛이 있는 것 같거든. 우열 없이 각기 다른 관계가 주는 아름다움을 누리는 거지. 아무런 기대 없이.


거의 탈진 상태로 숙소로 돌아와 삼겹살이랑 연어 구이, 연어 타다끼, 연어 스시를 만들기 시작했어. 연어는 시댁 삼촌이 알래스카에서 며칠 전에 잡아오신 거라 아주 싱싱했지. 매년 이 맘 때 낚시를 가셔서 자연산 은대구, 연어, 연어알을 잔뜩 얻어먹을 수 있는 타이밍을 친구들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어 행복했어. 노르웨이 연어보다 기름기가 적고 붉어서 어딘가 익숙지 않은 맛도 났지만 싱싱한 맛에 자꾸 들어가더라.


애기들이 먹을 게 없을까 봐 김도 자르고 떡볶이도 만들고 오이부추겉절이도 후다닥 만들었어. 아, 연희 된장으로 쌈장도 만들고. 친구들이 겉절이랑 쌈장을 잘 먹는 걸 보고 흐뭇했어. 이번에 한국 가서 연희 된장을 한가득 가져왔거든. 집간장이랑 고춧가루도.


연희 매실도 가져왔는데, 매실청 있잖아. 2리터나 가지고 왔거든? 근데 남편이 그걸 너무 좋아해서 퇴근하면 매일 미국 스런 큰 컵에다가 엄마 매실청을 콸콸 부어서 얼음 넣고 마시는 거야. 그 콸콸 소리 날 때마다 뭔가 미국사람이 매실청 좋아하는 게 웃기면서도 아까워 죽겠는 거야. 나는 아끼느라 한 스푼씩 먹는데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콸콸.


그래서 하루는 결단을 내렸지. 이거 그렇게 먹는 거 아니다. 지금부터는 이거 요리할 때 쓸 거니까 당신은 먹지 마라. 그래도 나 이거 꽉 차 있던 거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참다가 말하는 거다. 그랬더니 알겠데.


남편은 숫자로 설명해 주면 각인이 잘 되는 사람인지라 마침 마트에 장 보러 간 김에 매실청 손바닥만 한 거 보여주면서 설명해 줬어. 이거 손바닥 만한 게 7.99달러다. 한화로 만원 넘는다. 연희 매실청은 값으로 매길 수 없다. 그랬더니 또 끄덕끄덕 웃음 참는 표정으로 알겠데.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1절만 할 걸 싶은 생각이 들었어. 태세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지.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매실금지령을 풀었어.


다음 날부터 콸콸 소리는 멈추고 졸졸졸 조심히 붓더라고. 연희 매실청의 가치를 알아줘서 이제 나는 여한이 없어.




삼 년 전에 심어놨던 밤톨만 한 선인장(cholla cactus)이 새 싹을 냈다. 암만 기다려도 안 커서 죽은 줄 알았는데, 삼 년 동안 혼자 속으로 저렇게 용을 쓰고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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