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으로 삼을 용기에 대하여
오랜만의 대붓 퍼포먼스. 예전엔 기업 콜라보를 주로 했으나 몇 년 전부터는 공익성 퍼포먼스가 더 많아졌다. 이유는 모르겠다. 삶의 터전이 바뀐 탓도 있고, 나란 사람이 매일 바뀌기도 하고, 여타 알 수 없는 변수들에 의해 자연히 이런 흐름 위에 있다.
남편과 맷을 동행하고 행사장을 찾았다. 로터스 페스티벌(Lotus Festival, 로스앤젤레스시가 매년 주관하는 축제)의 올해 주빈국이 한국이라, 행사장 중앙에 위치한 한국 부스와 무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글씨 쓸 종이를 설치하고 조용히 잔디 위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며 주문을 외웠다.
'오버하지 말자. 너무 신나지 말자.'
스탠딩 캔버스를 이용하는 퍼포먼스는 무대에서 진행하지만 바닥에서 하는 대붓 퍼포먼스는 주로 객석 중앙 통로를 이용한다. 20대부터 길거리에 잘 앉아있던 나는, 땅바닥에 앉자마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눈을 감고 가만히 이 상황을 느껴본다. 꾸준히 설 무대가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내 삶은 사람들 앞에서 계속 글씨를 쓰라했고, 말을 하라 했다. 그래서 서예를 하고 통역을 해 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 공고한 내가 되어가면서도 나를 놓는 법도 알게 되었다. 나를 놓을수록 나를 낳았다. 축복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 사회자의 마이크를 건네받아 퍼포먼스에 앞서 간략한 작품 설명을 하는데, 관중의 다양한 표정들이 슬로 모션으로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궁금하고 신기한 표정들.
페스티벌의 주제인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하나의 연꽃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함께 피어나다'로 적을 것이라 설명하자, 이내 전주가 흘러나온다.
드디어 대붓을 검은 먹에 흠뻑 적셔 첫 획을 찍은 순간,
빠직-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나 버린 붓. 평소보다 먹을 무겁게 적신 데다 신나서 과도하게 눌러버린 탓에 붓허리가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것. 순간 객석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탄식 소리,
"Ohh...!"
대붓과 관객의 탄식 속, 내 몸이 내린 결정은 의외로 단순했다. 감정이란 게 일어날 틈도 없이, 반토막 붓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 들고 음악에 맞춰 선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짧아진 붓의 길이로 인해 몸의 중심축이 낮아지면서 의도치 않게 평소보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연출되었고, 관객들은 부러진 붓으로 끝까지 퍼포먼스를 이어가는 모습에 아낌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쯤 되자 이제 이 무대는 나와 관객이 함께 해나가는 무언가로 변해 있었고, '함께 피어나다'에서 '함께 어떻게든 피워내자'가 되었다. 부러진 붓이 주는 새로운 감각의 향연에 아드레날린이 폭발했지만 속으로 누르며 기도를 올렸다.
'붓이 부러져 얼마나 다행인지요. 세상에, 이런 맛도 알게 해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울컥하는 마음을 실어 손에 붉은 아크릴을 한가득 짤아 손바닥 낙관을 했다. 쇼가 끝났다는 인사를 올리자 사람들이 다가와 내 손에 남은 붉은 아크릴을 자신들의 옷과 가방에 찍어달라 요청했다.
웃기고 민망했지만 심드렁한 표정으로 꾹 찍어주고, 그들과 오랜 인사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