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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서랍이 열리는 순간

highlights

by ACCIGRAPHY




"아찌! 엄마가 빨리 오래!"


여자 화장실에 울려 퍼지는 조카의 목소리. 동대구터미널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출발 5분을 남겨 놓고 잠시 화장실을 들린 차였다.


"뭐 하러 왔노, 아찌 이제 나가는데."


"엄마가 승차홈에서 화장실 멀다고, 아찌 길 잃어버린다고 빨리 가보래."


언니의 예언은 맞았고, 동대구터미널은 생각보다 넓고 복잡했다. 조카와 나는 전속력으로 승차홈을 향해 달려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엄마가 아찌 핸드폰 없으니까 빨리 가보라는데, 나도 길치잖아? (헥헥) 그래서 핸드폰으로 설명해도 못 알아먹을 수 있으니까 엄마가 가는 길 중간중간에 셋째 이모랑 이모부 세워 놓을 테니까 갔다 오라곸ㅋㅋ 핳ㅎㅎ"


"앜ㅋㅋ 뭔데ㅋㅋ 헨젤과 그레텔이가?"


"그니깤ㅋㅋ"


-


헐떡임과 웃음이 난무하는 와중에, 뽀로로 좋아하던 애기는 훌쩍 커서 의지할 구석이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애기 시절 조카도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변했지만 그대로이고, 그대로이기 위해 변할 수밖에 없는 삶의 신비가 조카의 웃는 얼굴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세 살 배기 조카와 고 3이 된 조카, 20대 중반의 나와 마흔이 넘은 내가 우르르 헥헥대며 승차홈을 향해 달렸다. 언젠가부터 나는 삶의 하이라이트를 진행형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이 그 순간임을, 다시 못 올 삶의 환희를 통과하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영원의 서랍을 열어 이 빛나는 순간을 담았다. 이미 그 속에 들어가 있던 형형색색의 다른 기억들이 새로 들어온 빛에 의해 출렁였다. 그곳은 쓰면 쓸수록 빛나고 커져갔는데, 그 모습이 마치 모든 순간을 여기에 넣어 보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다.


삶의 명령에 고분고분한 나는, 덕분에 거대한 영원의 서랍을 지니게 되었다. 어딜 가도 믿는 바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 불안과 결핍이 기본값인 세상에서, 기쁨과 감사가 기본값인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물론 살다 보면 안 그런 날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날들이 그랬다.


뭔가를 이루어서 기쁜 게 아닌

이미 받은 것들이 차고 넘침을 아는데서 오는

면목없는 감사


혹은 가끔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신기함에서 오는

난데없는 기쁨


나를 잡아먹는 생각들에 포위될 때마다

영원의 서랍을 활짝 열어

빛이 어둠을 제압하는 것을 바라본다


영원의 서랍은 아름다운 추억이자

영원히 현재하는 아름다움이고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아름다울 미래






대문사진: 울산암각화박물관. 서예의 시작은 ‘종이에 붓’이 아니라 ‘돌에 칼’이었기에 꼭 가보고 싶었던 곳. 둘째 언니가 찍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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