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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겠다는

착각

by ACCIGRAPHY




맨날 신선놀음만 하면 좋겠지만 한 번씩 말끔히 차려입고 돈을 벌러 갑니다. 엊그제는 사회와 통역을 맡았어요. 백제 유물이 미국에 처음으로 전시되었거든요.


저는 다양한 직업적 자아를 거쳐오면서 8년 정도 통역하며 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시절의 저는 죽고 없어요. 전생이죠. 그런데 막상 무대에 서자 그 시절에 형성된 회로가 샤샤샥 돌아가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어요?


어쩌면 더 원활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때 없던 능력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퍼포먼스를 가로막던 요소들이 사라진 것 같기도 하달까요.


평소에 쓰지 않는 용어로 가득한, 유물 관련 통역이라 마음에 큰 저항이 일었지만 그냥 하기로 했어요. 백제 유물을 가지고 오신 분이 제 은인이시거든요. 미국에 처음 와서 재외공관에 지원했을 때, 당시 공관장으로 계시면서 저를 믿고 뽑아주신 분. 퇴사한 마당에 면목이 없었지만, 인사라도 드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아니, 근데 보름 동안 백제의 문화와 유물을 살펴보는 와중에, 이걸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거예요. 백제가 이렇게 매력적인 왕국이었구나. 저는 대가야의 후손이지만 말투도 느긋한 편이고 직선보다는 곡선형 인간인지라 백제가 퍽 마음에 들었어요. 평소 표정도 석굴암 아미타불보다는 서산 마애삼존불에 가깝고요.


백제금동대향로 바닥을 받치고 있는 용과 아이컨택을 하면서, '너의 이야기를 이곳 사람들에게 신나게 풀어주마! 조금만 기다리렴!'외치며 용을 쓰고 준비했어요.


드디어 전시 개막일

아침에 시간이 남아 자료를 더 볼 수도 있었지만, 그만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꺼운 도록 속 생경했던 단어들이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기도 했고, 어차피 무대 위에선 다른 자아가 튀어나오니까요. 그녀에게 모든 걸 맡긴 채, 그저 편안히 숨을 쉬었습니다.


물론 완벽한 준비란 없겠죠. 그럼에도 스스로의 역량과 주어진 상황 속에서의 최선은 있는 법. 그 지점에만 가도, 준비 과정에서 안으로 응축된 에너지가 청중에게 가 닿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그 지점에 대한 민감한 이해가 스스로에 대한 앎으로 직결되었습니다.


준비를 덜 하면 부끄럽고, 과하면 탈이 났어요. 성장해 감에 따라 이 지점 또한 끊임없이 움직이기에 ‘이제 알겠다’ 같은 건 없더라고요. 매번 다르고 새롭죠.


진행과 통역을 병행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지만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여기서 '잘'은 현장에서 산발하는 변수를 백만 번 정도 쳐내는 와중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고 얼굴에 미소를 유지하는 걸 의미합니다.




평소에 조용히 붓글씨나 쓰고 지내는 사람이 한 달 치 할 말을 한꺼번에 쏟았더니, 새벽 3시가 지나도 심박수가 내려가지 않는 거예요. 단순한 불면의 밤은 아닌지라 축하하고 싶었습니다. 홀로 조용히 침대에 누워 난리난 심장을 부여잡고 씽긋이 웃었으며 말했어요.


고생했다.

또 하나 배웠다.


포스터 이미지 출처: 충남역사문화연구원, LA한국문화원




*LA에 사시는 분들께, 현재 LA한국문화원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 'Baekje: The Hidden Cultural Heritage of Korea'에 들러보시길 권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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