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갑신정변 이후 10년. 조선에서는 청의 내정 간섭과 일본의 영향력 확대 속에 우울한 정치적 상황이 전개된 반면, 미국에 망명한 청년 서재필은 1894년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그해 명문 가문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안착시킵니다.1)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산업화에 따른 과잉 생산으로 오래전부터 경기 침체를 겪고 있었고, 이민자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중국인 배척법은 10년이나 연장되었으며, 일부 사업가나 정책 입안자들은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해외 시장 개척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2) 이러한 경제 불황과 인종차별 문제는 서재필의 병원 운영을 어렵게 했고, 적은 수입으로 생계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3) 하지만 빈손으로 시작하여 개인 병원 개업을 이룬 그였기 때문에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서재필은 경제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한 도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박영효의 귀국 요청이었습니다.
박영효가 미국에 도착하기 직전인 1894년의 조선은 동학농민운동, 일본의 경복궁 침입,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연이어 겪고 있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박영효를 전면에 내세운 후 갑신정변을 일으킨 죄인들을 사면하였고, 이들을 통해 일본에 더 유리한 개혁이 추진되기를 기대했습니다.4)
이런 상황에서 박영효는 미국에 건너가 서재필에게 귀국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때가 1895년 6월이었는데, 서재필은 박영효의 귀국 요청을 거절합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미국인으로 살고자 했던 서재필 개인적인 상황이 거절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겠지만, 당시 개혁을 추진한 새 내각이 고종의 신임을 잃고 갑신정변 당시와 같이 왕의 측근과 서로 반목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재필은 박영효의 요청을 수락할 수 없었습니다.5)
홀로 귀국한 박영효는 갑오개혁을 계속 추진하는데, 이때 일본의 의도와는 다르게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시킵니다. 박영효가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지 않자 일본 공사는 그를 배척하게 되고, 그는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납니다.6)
그러자 박영효는 워싱턴에 있는 서재필을 찾아 또다시 귀국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의 귀국 요청은 박영효 자신이 이루지 못한 개혁을 서재필로 계승하도록 하기 위한 숭고한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영효는 서재필이 귀국하여 확고한 자리를 잡으면 단지 그의 힘을 빌려 역모 혐의를 벗고 다시 옛 자리로 복귀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7)
당시 서재필은 10년 여년의 시간을 보내며 우리말은 점점 서툴러졌으나 미국말은 능숙했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상황에서 의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얻은 후 미국 여성과 결혼까지 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자신을 배척했던 정부는 아직도 개혁 세력과 갈등을 벌이고 있었고, 자신에게 귀국을 권유한 인물은 그 정부로부터 두 번째 역모자의 낙인을 얻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옳을까요?
결정은 둘째치고 고국의 정치적 상황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영효를 처음 만나고, 다시 그를 만나기까지의 4개월의 시간 동안 서재필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공익을 위해 힘쓰다가 모든 것을 잃었고,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잊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에 도전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그때에 난데없이 찾아온 옛 동료는 개혁을 위해 홀로 돌아가라고 하는 상황은 서재필에게 참 난감한 문제였습니다.
만약 영화라면 처음 실패 때와는 다르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여건이 제공되어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도록 하겠지만, 갑오개혁 당시의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개혁을 제안한 친구는 반역 죄인으로 쫓겨 온 상황이었고, 도움을 요청받은 청년이 귀국하여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부탁은 어떻게 생각해도 너무 위험했고, 갑신정변이라는 죽음의 위기를 경험한 사람에게 다시 죽으러 가달라는 부탁과 같았습니다. 과연 이 무모한 도전을 수락하는 것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32세 청년 서재필은 고심 끝에 귀국을 결정합니다.
도대체 왜일까요?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박영효의 귀국 요청으로 점차 고국에 대한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고, 멀리하던 주미공사관에 출입을 하게 되며, 당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에 어려움 겪게 되자 주미공사관으로부터 도움도 받게 되면서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8)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설명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년이기 때문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의로움이라는 가치 하나로 조선의 개혁이라는 도전을 다시 받아들인 걸까요? 청년 서재필이 만약 이익을 좇는 기회주의자였다면 그런 모험을 수용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는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했던 걸까요? 그 이유는 그가 보인 행동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귀국 당시 갑신정변에 함께 했던 동료들은 죽거나 나라를 떠났거나 떠나려고 준비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귀국을 준비하는 중 조선에서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왕비가 살해당하고, 관료들 중 일부는 피살될까 두려워 미국공사관에 은신하고 있었습니다. 11년 전과 달라진 것 없이 서로 모해하고 살육하는 당시의 상황에 서재필은 크게 낙담했습니다. 게다가 귀국 당시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이나 환영 행사는 없었고, 그는 그저 ‘혼자’였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서재필은 귀국하자마자 다시 미국으로 떠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선에 남습니다. 그리고 정부 쪽에 붙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아첨하며 원하는 이익을 얻었던 것이 아니라 정부에게 다시 배척당할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정부의 실책과 부패를 비판합니다. 그래서 결국 개혁에 불만을 품은 정부로부터 미움을 받아 다시 쫓겨나는 처지가 됩니다.
그렇게 나라에 다시 배신당한 상황에서 고국을 잊을 법도 한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자비를 들여 미국에서 민족운동을 주도합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국내의 정치적 분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국을 다시 찾습니다.
이러한 일관된 행위는 그의 개화사상이 처음 형성될 때부터 시작된 청년의 신념에 바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였고, 그런 정의로움이 박영효의 억지스러운 요청을 받아들여 어려운 길을 걷도록 한 것입니다.
양심에 반응하여 민족을 구하기로 한 결단은 서재필에게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신념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청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신념입니다. 그 신념은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위험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게 하며, 역사 발전의 시작을 이뤄냅니다.
서재필은,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미국인으로서 고국을 잊고 살기로 했겠지만, 청년의 마음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0-31쪽
2) 강택구, 「19세기 후반 미국의 극동 진출의 정책적 동향」, 『동국사학』47,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09, 291-292쪽
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2, 휴머니스트, 2022, 250·435쪽
3)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0-31쪽
4) 박성진, 「서재필과 이승만의 만남과 갈등 ―개화기, 독립운동기, 해방정국기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67,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9, 601쪽
5) 김봉진, 「서재필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형성과 상극」, 『한국문화』4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8.6, 13-14쪽
6) 「박영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7) 구선희, 「[인물바로보기 2] '시세를 보고 있는' 개혁가 박영효」, 『내일을 여는 역사』, 재단법인 내일을여는역사재단, 2000.10, 155쪽
8)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177쪽
9)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