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재필,#042 11년 만의 귀국과 미국인 서재필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by 연결고리


청년 시절 읽기


#042 11년 만의 귀국과 미국인 서재필의 대우



서재필은 박영효의 만남 두 달 후인 1895년 12월 25일, 조선에 도착합니다.1) 11년 만에 고국 땅을 다시 밟은 32세의 청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당시는 을미사변 직후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어수선했고, 일부 관료들은 암살 위협까지 느끼던 상황이었으므로 그가 의지할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때 상심한 서재필의 마음을 돌려놓은 사람이 유길준이었습니다. 그는 서재필보다 8살 많은 청년으로 김옥균·서재필 등과 같이 오경석·유홍기·박규수의 문하에서 개화사상을 익혔고,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던 인물이기에 조선에서 국제 정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개화파였습니다. 그는 갑신정변 실패 소식을 들은 후 미국 유학을 중단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귀국했는데 갑신정변의 주모자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됩니다. 간신히 극형을 면하고 감금 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 비공식적으로는 정부의 대외관계 자문역할을 합니다. 감금 생활이 끝난 후에는 갑오개혁에 참여하였고, 을미사변 직후에는 내부대신이 되어 단발령을 강행하기도 했습니다.2)


유길준은 조선의 개혁을 위해 서재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간곡하게 만류했고, 결국 서재필은 생각을 바꾸어 조선에 남아 민중 계몽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유길준이 아니었다면 서재필의 업적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때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10년간 정부 대신(지금의 장관)이 받는 월급과 같은 액수를 받기로 계약했는데,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유길준이 서재필을 조선에 잡아두려는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3)


서재필은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정부 관료가 될 수 없어 ‘고문(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조언하는 직책)’을 하게 되는데, 민족을 위해 일하러 왔으면서도 고문으로서 너무 큰 액수를 받은 것에 대한 비판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물욕’이 있다는 관점에서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갑신정변으로 망명하기 전에 그는 세도가문의 양자로 출세한 양반이었고, 미국에서는 사회적 지위를 얻은 의사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대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명성과 대우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정부 역시 미국인이라는 서재필의 신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대우하여 을미사변으로 인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국 조선에서 겪은 신분적 출세욕, 미국에서 습득한 능력에 따른 합리주의적 대우, 개혁에 필요한 높은 지위의 필요성, 정부의 요구 등이 결부되어 그런 파격적인 대우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 청년 서재필은 정부의 파격적인 대우를 바탕으로 조선 사회를 개혁하려는 두 번째 도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갑신정변 당시의 도전은 정부의 지도층으로부터 개혁을 시도한 것이라면, 이번 도전은 민중을 계몽하여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이었습니다.4) 서재필 자신이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은 민중의 지지 부족과 외세 의존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5) 이번 도전이 민중에 초점 맞춰진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성과는 잘 알려진 『독립신문』 창간입니다. 1896년, 33세라는 혈기 왕성한 청년의 열정으로 시작한 이 사업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어렵게 추진됩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것은 맞지만, 박영효가 쫓겨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 정부는 일본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측의 신경은 날카로워집니다. 이때 미국인의 신분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인물이 됩니다.


정부는 이런 서재필을 적극 활용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극복하고 자주적인 개혁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의 귀국은 ‘신상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일본 측의 예상과는 반대로, 정부는 서재필을 ‘미국인으로서 고액 월급을 받는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합니다. 일본이 이 상황에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합니다.


서재필은 미국인이라는 신분적 특혜, 정부의 파격적인 대우를 적절히 활용하고, 더 나아가 정부 관리가 아닌 중추원 고문이라는 명목으로 정치적 논란도 피해 가는 지혜를 발휘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나갑니다.6)


잠시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에 대해 언급하려고 합니다. 당시의 고구려 왕은 반란을 진압한 후 각 세력에 대한 왕실의 통제력을 강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때 왕은 신하들의 추천을 받은 한 사람에게 국정을 맡기려 했는데, 그 사람은 오히려 을파소를 왕에게 추천합니다. 그래서 왕은 나름 고위직을 맡겨 을파소를 초빙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을파소는 어진 사람을 뽑아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큰일을 이루라며 사양합니다.


을파소의 사양은 겸손의 사양이 아니라 큰일을 하게 될 때 최고의 자리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한 사양’이었습니다. 왕은 그의 뜻을 이해하고 그를 국가 최고 자리인 국상(國相)에 임명합니다. 그리하여 을파소는 개혁을 추진하게 되는데 그가 만든 법이 우리나라 최초의 복지제도인 ‘진대법’입니다.7)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서재필은 을파소와 비슷한 대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귀국한 서재필이 미국의 국적을 버리고, 반역 죄인이라는 낙인에, 정부의 대우도 없이, 정부가 명령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위치였다면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민중 계몽이라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겸손’보다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현실적인 지위’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개혁을 시도하려는 청년이라면 기회가 왔을 때 연봉, 직위 등에서 합당한 대우를 당당히 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실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으며 개혁의 권위도 세울 수 있습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발간하기 전에 서울 상인들의 경제적 이권 보호를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안’을 가결시킨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을 거쳐 석유를 수입했는데, 미국에서 석유를 직수입하면 당연히 가격이 내려갈 것이기 때문에 이를 추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서울 상인들에게는 이익이었지만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심각하게 위협한 일이었기 때문에 서재필은 암살위협에 시달렸고, 이런 상황에서 일본 공사는 독립신문 발간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은 신문 발행을 포기할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인이라는 신분과 정부의 파격적인 대우는 개혁에 힘을 실으면서 동시에 신변 보호를 위해 서재필에게 반드시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2쪽
2) 「유길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박현모 외, 「유길준」,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휴머니스트, 2006, 네이버 지식백과
3)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2-33·35·37쪽
4)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6쪽
5)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24쪽
6)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179-182쪽
7) 고운기, 「을파소」, 『인물한국사』, 2010, 네이버 지식백과
「을파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8)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7쪽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184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keyword
이전 19화청년 서재필, #041 박영효의 귀국 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