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재필, #043 독립신문, 독립협회, 협성회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by 연결고리

청년 시절 읽기


#043 독립신문, 독립협회, 협성회



일본의 영향력이 여전한 상황에서 독립신문 발행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성공하자 친일 내각은 무너지고, 친미·친러파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내각이 구성됩니다. 그리하여 일본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집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청년 서재필은 그해 4월 7일 드디어 신문을 발간합니다. 이날이 바로 신문의 날입니다. 당시 새롭게 구성된 정부는 단발령을 취소하거나 과거의 의정부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복고적인 분위기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최초의 근대 신문이 발행된 것은 근대 개혁의 측면에서 매우 뜻깊은 일이었습니다.1)


청년은 최초의 민간 신문에 ‘독립’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알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매우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명칭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재필보다 20여 년 앞서 태어난 보수 유생들은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을 일으켰을지라도 중국을 사대하는 고정관념은 그대로였기 때문에2) 당시의 상황에서 ‘독립’이라는 용어를 쉽게 떠올리고,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까닭에 ‘독립’이라는 용어에는 조선의 위태로운 상황을 극복하려는 청년만의 패기와 열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문 발행 과정에서도 청년의 열정과 능력이 발휘됩니다. 서재필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귀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신문 발행을 이루어냅니다. 이것은 보통의 능력과 열의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먼저 신문 발행을 위해서는 최소한 인쇄 기계와 활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일본에 주문해야 했고 당시 열악한 교통상황을 고려한다면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인쇄 기계가 도착해도 이를 설치하고 운영할 인쇄공과 기술자들의 확보가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독립신문은 한글판 이외에 영문판으로도 발행되었기 때문에 영문판을 조판할 능력을 갖춘 기술자도 있어야 했습니다.3)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돈’이 필요했습니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일본의 위협이 있었으며, 11년 만에 귀국하여 한국어도 잘하지 못하는 청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3개월이라는 시간은 그저 한국의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그런 난관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해치워버립니다. 이것은 청년의 피 끓는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신문이 발행된 이후 독립신문은 신문 강령에 근거한 개혁을 추진합니다. 독립신문 영문판 창간호에 언급된 신문 강령은 ① 조선 국민을 위한 조선, ② 깨끗한 정치, ③ 대외적 우호관계의 유대증진, ④ 조선 자본에 의한 조선 자원의 꾸준하고도 점진적인 개발 등이었습니다.4) 서재필은 이 강령을 따라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합니다. 이점이 가능했던 것은 정부가 독립신문 발간 자금을 대면서도 신문 내용에는 전혀 관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5)


십여 년 전, 정부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이라 일컫는 한성순보를 발행했을 때, 정부가 자신들의 문제점을 스스로 지적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근대 이행을 위해서 민간 신문의 발행은 필수적인 요소였고, ‘깨끗한 정치’를 희망한 서재필의 의도는 독립신문에 정확히 반영됩니다. 그리고 이후에 발행되는 민간 신문에서도 독립신문의 영향을 따라 정부 비판적인 논조가 계승됩니다.


독립신문의 발행은 조선의 개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서재필 개인에게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서재필은 개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아직까지 군주가 존재하던 시대였으며 청일전쟁에 패배한 중국이어도 중국을 여전히 사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유생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개화에 반대하는 세력은 청과의 사대관계 청산을 반대하였고, 오히려 갑신역당의 죄를 물으며 독립신문 폐간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려 서재필을 끊임없이 공격했습니다.


당시 청년 서재필은 고종을 알현할 때 자신을 신하라 칭하지 않거나, 고종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고, 대신 등 고위 관료들을 버릇없는 애들을 타이르듯 다루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6)


인신공격과 모함이 계속되지 이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서재필은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형사 고발하고, 명예훼손 배상금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재판에서 승소합니다. 이 때문에 고발당한 피고는 배상금과 함께 3년 유배형에 처해집니다.7) 청년 서재필에게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마주할 수 있는 강심장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중도에 개혁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청년 서재필은 이렇게 열정적으로 개혁에 박차를 가했는데, 아쉽게도 그의 업적을 모두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재필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에 이끌린 이후 조선의 낙후된 상황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반면, 미국과 일본처럼 문명이 발전된 나라에 대해서는 그들의 침략적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채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독립신문에 실렸던 다음 글은 독립신문의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조선 사람은 일본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할 줄을 모른다.
동양의 주인은 일본이다.
조선독립은 일본이 시켜줄 것이다.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며 죽을병이 든 사람인데 일본은 의원이다.
병자년 이후 일본 덕택으로 조선은 잘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불쌍하고 더러운 백성은 조선 백성이니 대한 사람은 외국에 가서도 협잡을 하려 하고 남을 속이려 든다.8)


독립신문에 이런 글들이 실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역사를 ‘신화’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불안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존재이므로 이와 같은 한계나 모순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글이 당시에는 조선을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은 지금의 일본이 우리를 비웃을 수 있는 소재가 되고, 우리들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역사가 됩니다.


청년의 때에 현실에 분노하여 남긴 잘못된 기록들이 훗날에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되고, 그로 인해 논쟁이 일어나고, 우리를 식민지화한 나라로부터 비웃음을 받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따라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간절함으로 피가 끓는 청년일수록 상황을 좀 더 ‘숙고’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독립신문을 창간한 청년의 업적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으로 사람들을 계몽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거 중국 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독립기념물 건조사업계획을 추진합니다. 이것이 내각과 집권 관리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게 되자 당대 최상류급 인사들 14명을 모아 독립협회를 창립합니다. 여기에는 외부대신이자 아직까지는 민족을 배신하지 않은 이완용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독립문 건조와 독립협회 조직은 모두 서재필이 제안한 것이지만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까지 그 자신은 제삼자인 것처럼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석유 직수입회사 설립 추진 당시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관심의 대상이 된 후 일본 측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경험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미국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조력자의 입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덕분에 독립협회는 서재필로 인한 정치적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안전하게 출범하게 됩니다.9)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이외에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가 귀국 후 가장 먼저 쓴 글은 ‘조선이 가장 필요한 것’이었는데, 이 글의 절반은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었습니다.10)


이런 이유로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매주 목요일마다 세계지리·역사·정치학 등에 관한 특강을 진행했는데 이때 서재필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처음 가르친 사람이 되었고, 학생들에게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당시 서재필의 강의에 자극받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협성회’라는 토론 단체가 조직되는데, 이 단체는 점차 국내외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게 되었고, 정부 고관, 외교사절단을 포함한 6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토론의 시범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토론 문화는 독립협회로 이어져 약 1만 명의 대중이 참여하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게 됩니다.11)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행사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정부를 비판했던 당시의 장면은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 충격이었으며, 앞에서 언급했던 주제들을 바탕으로 정부가 제대로 역할 하도록 대중이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열린사회’가 이제 시작된 것이니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30대 청년 서재필이 귀국 한 1895년 12월부터 1898년 5월까지 단 2년 5개월 동안 이뤄낸 일입니다.



토론회에 참여한 한 인사가 자신의 일기에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감탄하고 존경하게 된다.”라고 서재필을 묘사한 것처럼 서재필은 조선 사람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12) 그가 계속 조선에 남아 있었다면 어떤 개혁을 더 이끌었을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1)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7-38쪽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193쪽
2)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8쪽
3) 정진석,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논쟁점들」, 『언론과 사회』, 언론과 사회, 1994, 20쪽
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196쪽
5) 정진석, 「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논쟁점들」, 『언론과 사회』, 언론과 사회, 1994, 12쪽
6) 박성진, 「서재필과 이승만의 만남과 갈등 ―개화기, 독립운동기, 해방정국기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67,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9, 606쪽
7)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198-199쪽
8) 정진석, 「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논쟁점들」, 『언론과 사회』, 언론과 사회, 1994, 9-10쪽
9)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200-205쪽
10)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38-39쪽
11)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40-41쪽
「협성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12)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41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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