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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las Aug 04. 2024

공간의 마술, 시간의 연금술 - 다니엘 아샴(2)

부수었더니 예술이더라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 (One Year)

아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미래유물은 '침식'이라는 제목과 함께 12개의 NFT작품으로 재탄생합니다. 이 시리즈들은 2021년과2022년에 만들어 졌는데 작품부터 우선 감상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저도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요. 디지털 아트에 관심이 없던 제가 NFT아트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작품들이었습니다. 특히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 (One Year)에서 받은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이 영상 작품을 수차례 돌려본 후 곧장 아샴의 모든 작품들을 찾아보았으니까요. 파괴된 조각상이 오히려 완전한 형상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죠.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파괴되어서 좋다기보다 이미 너무나 아름다운 조각상이 큰 상처가 나듯 파손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각상이 원래부터 그리 예쁘고 멋지지 않았다면 파손이 된다한들 크게 신경이나 쓰일까요? 이미 멋진 외관을 갖고 있었는데 침식되니 더 극적으로 대비되며 숭고함마저 느껴집니다. 르네상스와 중세시기의 멋진 작품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죠. 르네상스 시기 최고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상을 볼까요? 뚜렷한 이목구비, 선명한 식스팩, 손등과 팔뚝의 핏줄과 헤어스타일까지. 철저한 식단 관리와 운동을 병행한 프로 운동선수의 완벽한 몸매 아닌가요? 멋지고 경외감이 들지만 나와는 동떨어진 조각상의 모습에 어쩐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반면 아샴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조각상의 부식이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고요히 스러져가는 인간의 얼굴에 오버렙됩니다. "그렇지 저게 바로 나와 같은 인간의 운명이지!"라고 감정이입을 하면서 말이죠. 우주와 생명이 마침내 도달하고야 마는 종착역. 그들도 나도 언젠가 사라지고 말 존재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거듭 부활하는 자

이 작품에는 어마어마한(?) 반전이 있는데요. 제목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로마의 침식과 개질의 흉상(1년)(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One Year). 침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거듭남(reforming)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죠. 단순히 부서져가는 것만이 아니었다는 사실! 

침식된 조각상은 원래의 모습으로 진화(생성)를 거듭하다 처음의 침식된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원래의 형상대로재생되기 시작합니다. 침식되어 모두가 없어지는 인생 무상의 서러운 작품인 줄 알았더니, 알고보면 복원과 희망의 메시지까지 주고 있다는 삼삼한 반전. 제목 뒤의 1년(One Year)은 이 NFT가 1년을 주기로 침식과 재구성이 반복되며 모양이 변하기 때문에 붙은 것입니다. 작품의 모양이 변한다니 신기하죠? 하지만 사실입니다. 작품의 모양이 실제로 변합니다. 1년을 주기로 하기 때문에 조각상 침식과 더불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죠. 봄에는 분홍색 잎이 만발한 나무들이 드리워진 가운데 나비가 날아다니고 나무는 푸른 싱싱함을 유지합니다. 반면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지고 나무에도 서리가 내린 듯 하얀색으로 변합니다. 사계절이 매년 찾아오고 떠나듯 침식과 개질이 매년 거듭됩니다.  

이런 효과가 가능한 것은 기존 디지털 미디어 작품과 차별화되는 NFT아트의 특별한 기능 때문인데요. 바로 블록체인의 스마트 컨트랙트입니다.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해 복수의 디지털 이미지나 영상이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교체되도록 코딩을 한 것입니다. 아샴도 이 기능을 알게 되면서 NFT아트를 시작했다고 해요. 자신의 예술을 어떻게 NFT로 구현할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존 예술에서는 불가능했던 표현이 블록체인을 통해 구현되면서 아샴의 예술이 총체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된 것이죠.

침식 정도의 비교(위/아래)

상처에 돋은 새 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상의 파괴된 부분에서는 핑크 빛의 무언가가 반짝거립니다. 바로 수정(크리스탈)입니다. NFT뿐만 아니라 실물 조각 작품들에서도 침식된 부분에 수정을 배치한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요. 수정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물과 만나면 점점 자라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식된 공간을 수정으로 채우는 것은 재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상처가 난 곳에 새 살이 나오듯 수정의 성질을 이용해 회복과 치유의 가능성을 상상케 하는 것이죠. 소멸과 함께 새로운 탄생을 목격함으로써 우리는 상실의 좌절감이 아닌 '변화의 원리'를 깨닫게 되는데요. 소멸과 재구성, 좌절과 희망의 순환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푸시킨의 시를 연상케 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또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침식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 즐거운 날이 오리니 - 재구성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미래 유물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 허구의 고고학


이렇게 대입해보면 푸시킨 시의 감성과 아샴의 철학이 그럴듯하게 닮아 있지 않나요? 

감상은 자유니 마음껏 상상해 보자구요. 무엇을 상상하든 아름다움은 빼앗아 갈 수 없을 테니까요.

꽃처럼 피어난 수정

공간의 마술 - 디테일 대마왕

작품에서 조각상은 고고한 은유를 짊어지고 흥미로운 자태를 뽐냅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들을 빼고 배경만 집중해서 한 번 보세요. 뭐가 느껴지나요?

벚꽃이 흐드러진 숲이 보이는 고즈넉한 방, 천사가 내려올 듯 힘찬 햇살이 사선으로 뚫고 들어오는 동굴, 개구리가 우는 숲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연못.. 처음부터 '공간'을 주제로 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데요. 작품에서 첫 눈에 띄는 주인공은 조각상이겠지만 여러차례 감상을 하다보면 점점 배경이 눈에 들어 옵니다. 평범해 보이는 자연의 배경은 커다란 조각상과 콜라보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세련되기까지 합니다. 특히 Bust of Rome에 표현된 세세한 공간 연출을 관찰해 보면 그가 얼마나 건축과 공간에 애정이 많고 관심을 쏟는지 알 수 있습니다.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 (One Year) 갈무리

조각상 앞에 책이 두 권 있습니다. 두 권 중 한 권의 책은 돌아오자마자 다시 읽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책의 한쪽을 둥글게 말아 읽던 페이지를 열어두었군요. 마치 방금 전까지 옆에 놓인 방석에 누군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죠. 다소 심심할 수도 있는 배경에 방석과 펼친 책만으로 작품에 생동감을 주고 온기를 불어 넣습니다. 사람의 흔적. 이 공간이 단순히 작품을 돋보이기 위함이 아닌 사람의 호흡과 기억이 머무르는 '현재성'과 '현장성'의 공간임을 암시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쇠퇴와 재생의 무한한 순환을 나타내는 조각상과, 유한하지만 실재하는 우리들의 자취를 같은 공간 안에 밀도 높게 표현했습니다. 

또 의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펼쳐진 페이지에 드러난 색은 배경공간과 같은 톤의 갈색과 검은색 계열로 위화감이 전혀 없죠. 이런 디테일 장인같으니라고! 저 옆쪽 탁 트인 방의 한쪽 면에는 햇살을 가리는 차양막이 내려와 있어요. 작품의 아랫부분은 그림자로 다소 어둡게, 작품의 중간과 윗부분을 햇살이 비추도록 해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분위기가 되었어요. 마음 편히 힐링하면서 독서도 하고, 차도 마시고 싶어지지 않나요? 실제로 이런 곳이 있다면 가보고 싶을 정도로 아늑하고 정갈합니다. 

Eroding and Reforming Bust of Rome (One Year) 갈무리
Bust of Rome(가을)

조각상 옆에서 책을 읽던 그 사람은 작가 본인일 수도 있고 저와 여러분같은 관객(감상자)일 수도 있습니다. 아샴은 자신의 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했고 관객들은 어느새 주인공이 되어 작품 안팎을 드나듭니다. 우리를 관객으로 만드는 이 공간은 바로 아샴이 꾸민 전시장이자 미술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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