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oding and Reforming Digital Sculptures 컬렉션에는 3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시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제목에서 보이는 지구의 날, 72.6년, 화성의 날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제우스의 흉상이군요. 제우스는 신들의 왕으로 하늘을 지배하며 우주를 주관하는데요, '지구의 날(Earth Day)'이라는 표현처럼 지구의 24시간을 기준으로 낮과 밤의 배경이 변합니다. 동일한 한 작품이 시간에 따라 변하면서 4가지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데 새벽 동틀 무렵, 정오, 황혼, 자정의 모습으로 하루 4번 변화합니다. 신들의 왕도 시간의 흐름은 피할 수 없나 봅니다. 그냥 보면 너무 밋밋할거라고 생각했는지 어지럽지 않은 정도로 시점을 살살 옮겨가면서 카메라 워킹(?)을 해주는군요. 또 잘 들어보면 시간대에 따라 개구리 소리, 새 소리, 귀뚜라미 소리 등 다른 사운드가 들려 더욱 실감납니다. 역시 디테일, 디테일!
아를은 아프로디테라고도 불리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입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제우스의 딸이죠. 또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영어로는 금성(Venus)을 뜻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를=아프로디테=비너스입니다. 아를은 본래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바다에 떨어져 생성된 거품에서 태어났는데요.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는 그 장면을 '비너스(아프로디테)의 탄생'이라는 그림에서 아프로디테를 조개껍데기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얘길 하는 이유는 조각상 뒤에 있는 벽처럼 보이는 구조물 때문인데요. 어떤 이유로 뒤쪽의 다른 배경을 가리면서까지 벽을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굳이 추측을 해보자면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첫 번째는 아프로디테의 조개껍데기를 빗살이 쳐진 벽으로 형상화했을 가능성이에요. 이 배경 공간도 비너스라는 이름에 비추어 금성일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데요, 아프로디테가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지만 금성이라는 행성의 특성상 물이 없을테니 조개껍데기를 그대로 가져다 놓을 수는 없고 벽으로 대신 묘사한 것은 아닐까 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벽을 통해 침식 과정을 보다 눈에 띄게 하려 했을 가능성입니다. 이 작품은 아샴 작품 중 드물게 영상 작품이 아닌 고정된 이미지예요. 정적인 느낌이기에 침식과정이 확연히 보이지 않을 수 있죠. 게다가 72.6 Years라는 제목처럼 72.6년 동안 총 73개의 모습을 보여주며 진화하는데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천천히 변하니 변화과정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뒤의 벽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본다면 좀 더 실감나겠지요? '아를의 침식비교'이미지를 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비너스 상도 그렇지만 뒤의 벽의 철골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모양이 두드러집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그저 여러가지로 생각해보면서 재미를 찾아가는 것 뿐이죠.
그런데 왜 작품이 72.6년 동안이나 변화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72.6년은 바로 지구인의 평균 수명을 의미합니다. 침식된 비너스의 재구성 기간을 인간의 평균 생애 주기와 동일하게 만든 것이죠. 비너스의 재구성은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낸 것일까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아름다워진다면 어떨까요? 물론 이 작품이 만들어진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작품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해에 평균적으로 생을 다한다는 것이 진실이지만 말입니다. 70년이 넘는 초장기적 시야와 인간 삶의 시작과 끝이라는 원초적 조건의 조합이 무서울 정도로 짜임새 있습니다. 작품과 인간이 시간적 평행 선상에서 함께 변한다는 점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한 개의 에디션만 발행되었습니다.
멜포메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분야 중 비극을 담당하는 여신으로 역시 제우스의 딸이에요. 멜포메네라는 말은 '노래하는 여인'을 뜻하는데, 불행을 겪는 인간들에게 노래를 통해 힘을 주어 운명을 극복하고 승리하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멋진 신이죠? 위의 작품들은 사실 하나의 작품이에요. 화성의 날이라는 제목처럼 '화성의 시간'을 기준으로 작품의 모습이 변하는데 화성에서는 하루가 24시간 37분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그 시간을 기준으로 하루 24번 모양을 바꿉니다. 조각상의 침식 정도와 햇살이 내려오는 위치가 달라지죠. 아샴다운 디테일은 조각상 앞에 서 있는 작은 사람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조각상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의 크기로 비추어 볼 때 조각상의 크기가 대략 가늠이 되죠? 그리고 작품이 변할 때마다 사람의 자세와 몸의 방향도 조금씩 달라지는데요, 조각상이 무너져 내릴 정도가 되니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습니다. 안타까움일까요 아니면 당당함일까요?
이처럼 침식과 재구성 컬렉션은 지구, 금성, 화성을 그리스 신에 빗대어 각각 고유한 시간의 주기를 나타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를 반복하는 작품들을 보며 한 발짝 떨어져 삶을 조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순간도 언젠가 끝이 날 것임을 직감하게 되죠.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이 있기에 오히려 더욱 소중해 지는 우리의 유한한 삶입니다.
아샴의 NFT작품 12개 중 7개에 자동차가 주요 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아샴은 차를 좋아합니다. 특히 포르쉐와의 협업을 통해 차량 내부를 크리스털로 만들어 포르쉐 박물관과 미국, 영국 등에서 전시해 왔는데요. 모래, 석영, 셀레나이트(석고의 일종) 등의 지질학적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 고고학적 속성을 드러냈습니다. NFT작품에 등장하는 차들은 역사적인 영화인 백투더퓨처(The Back to the Future), 월스트리트(The Wall Street) 등에 등장했던 페라리, 들로리언, 포르쉐 등의 차종으로 역시 차의 외관이 부식됩니다. 영화와 차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이번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차량들의 침식 기간은 해당 영화의 상영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데요, 영화마다 상영 시간이 다르므로 각 작품들의 재생 주기 역시 다릅니다. 예컨대 작품 Eroding and Reforming E30의 경우 영화 월스트리트의 상영시간인 126분을, Eroding and Reforming DeLorean은 백투더퓨처의 상영시간인 116분을 기점으로 침식과 재구성이 반복됩니다.
아샴은 인생에서 다수의 일반인이 겪지 않는 두 가지 상황을 겪습니다. 첫 번째는 아샴이 12살이던 1992년 허리케인 앤드류가 아샴의 집을 완전히 파괴한 사건입니다. 그 후 같은 자리에 다시 집을 지었는데, 당시의 경험이 오늘날 아샴의 '침식과 재생' 예술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파괴를 단순히 상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복원의 희망을 꿈꾸는 장소로 전환시킨 과정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듯합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색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색맹이라는 점입니다. 때문에 그의 실물 조각 작품들에는 흰색, 회색, 검은색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작품 활동에 있어 색채의 부족을 '결여'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게서 일반인들과 다른 매력을 느낄 수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또 색을 구분하지 못한 덕분에 그는 물질의 성질과 질감에 집중했고 화산재, 수정, 유리 등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특히 뜨거운 마그마에 의해 가루가 된 화산재를 이용해 작품을 창조함으로써 소멸을 오히려 생성의 재료로 삼습니다. 화산재로 만든 실물 작품에서도 침식과 재구성, 순환의 과정이 적용된 셈이지요.
제약을 한계로 느끼지 않는 예술적 탐구와 호기심은 그를 NFT아트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민한 예술가는 블록체인의 장점을 흡수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NFT로 확장시켰습니다. 공간과 조각을 입체적으로 감상하도록 3D영상으로 제작했으며 시간흐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블록체인의 코딩을 활용했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차용한 스토리텔링과 세심한 연출, 심미적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는 작품들이 NFT로 부활했습니다. NFT작품들은 아샴이 이제까지 지나쳐온 모든 예술 분야, 즉 회화, 건축, 무대디자인, 조각, 영화 등의 총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에서 현대, 미래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시간의 폭을 이용해 상상력을 부추기면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춘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조금만 알고 보면 누구나 즐겁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건축과 무대 디자인을 통해 습득한 연출력, 나아가 각종 미디어를 통한 소통 능력과 NFT아트를 하면서도 NFT시장에만 매몰되지 않는 균형감각은 그저 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예술을 NFT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있었을 녹록치 않은 고민의 깊이와 블록체인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샴의 작품들이었습니다.
•니프티 게이트웨이 작품 https://www.niftygateway.com/@danielarsham/col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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