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생성 예술 플랫폼인 아트 블록스(Art Blocks)는 생성 예술의 특징을 활용해 구매자들의 기대심리를 한껏 높여 놓곤 합니다. 아트 블록스는 생성 예술 작품을 미리 제작한 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의 샘플 작품을 받아 심사를 거쳐 공개합니다. 구매자는 그 샘플들을 보고 대략적인 이미지를 가늠한 후 자신의 취향과 맞으면 미리 작품 비용을 지불합니다. 그 후 정해진 일시에 작품 판매가 완료되는 순간 실시간으로 조합된 따끈따끈한 작품들이 구매자의 지갑으로 들어오죠. 그때서야 구매자는 최종적으로 구매한 작품의 모양을 알 수 있습니다. 레디메이드(Ready-made) 기성품이 아닌 수요가 있을 때만 제작되는 온디맨드(On- Demand) 작품인 것입니다.
아트 블록스 웹사이트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도 당연히 중요한 감상 요소예요. 색과 형태의 배치, 패턴의 조합이 아름다워서 큰 관심을 받는 작품들도 많거든요. '피덴자(Fidenza)'라는 작품의 주인공인 타일러 홉스(Tyler Hobbs)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큰 인기를 얻어 온 대표적인 생성 예술가입니다. 타일러 홉스는 QQL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체르니악과 협업하여 작품을 민팅하기도 했어요. 체르니악과 더불어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던 생성 예술의 가치를 전세계에 알린 주요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코딩에 담긴 인간의 손맛
생성 예술은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화 작품을 만들 때 스케치를 하듯 생성 예술에서도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코딩이라는 과정을 거치거든요. 수차례의 코딩과 수정을 통해 다양한 미적 실험을 하고 자신의 예술 철학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결과물을 고안해 내요. 아무 속성값이나 랜덤으로 막 넣어 보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체르니악은 "생성 예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컴퓨터의 알고리즘이 모든 걸 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철학, 심성, 손길이 생각보다 깊숙이 자리하고 있답니다. 알고리즘은 결국 예술가의 철학을 담아내는 도구이자 그릇일 뿐입니다. 그림움일지, 사랑일지, 좌절일지. 예술가는 표현하고 관객은 보고 느낍니다. 각자 마음껏 상상하고 느껴보자구요. 오롯이 나의 시간, 나의 감정이니까요. 창작을 위한 고민의 시간과 사색은 붓 끝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20세기 미술사와 생성 예술 - 라이트 이어스(Light Years)
생성 예술이라는 낯선 분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생성 예술가 드미트리 체르니악의 작품들을 살펴볼게요. 체르니악은 NFT가 알려지기 이전부터 디지털 아트 작업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그는 다른 생성 예술가인 Jared Tarbell과 Zach Lieberman의 영감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Zach Lieberman은 현재까지도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해요.
The verge(Zach Lieberman)
뿐만 아니라 헝가리 태생 예술가이자 예술이론가인 모홀리 나기(Moholy Nagy/1895-1946)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적이 있어요. 모홀리 나기는 주로 사진을 다루었는데 미래에 기술의 발전이 예술 분야에 큰 영향을 줄 것임을 예견하며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체르니악이 2022년 12월 1일에 민팅한 NFT컬렉션인 ‘라이트 이어스(Light Years)’는 모홀리 나기의 예술 아카이브(작품을 포함한 기록물)를 살펴본 후 그의 가족들과 협업해 제작한 컬렉션입니다.
Light Years
그는 라이트 이어스 프로젝트를 통해 “20세기의 미술사와 오늘날의 제너러티브 아트를 연결하여, 세대는 떨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습니다. ‘Light Years’라는 이름도 그런 의도에서 나왔다고 해요. 빛의 속도로 20세기와 21세기 미래 미술을 연결해주면 좋겠습니다. 멋진 예술들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거든요.
모홀리 나기(왼쪽) / Komposition-a-xxi(모홀리 나기/ 오른쪽)
체르니악은 모홀리 나기의 예술과 기술 융합에 대한 비전에 공감했을 뿐 아니라 10년 간 스타트업의 CTO(최고기술책임자)로 재직했던 기술 전문가였기에 예술에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한 NFT아트에 뛰어들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미학이나 미술 전공이 아닌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나 엔지니어링 전공자들이 NFT 아트계에 특히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입니다.
체르니악이 본격적으로 생성 예술 아티스트로 알려진 것은 아트 블록스에서 링어스(Ringers) 시리즈를 민팅하면서부터인데요. 링어스는 그를 NFT 생성 예술계의 스타 반열에 오르게 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 작품들일까요?
말뚝을 박고 끈으로 이어라 - 링어스(Ringers)
1,000개의 링어스 컬렉션은 ‘말뚝’과 ‘말뚝들을 이어주는 끈’을 상징하는 동그라미와 선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021년 2월에 만들어진 컬렉션으로 작품들은 1~1,000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각기 무작위의 형태로 블록체인에 기록되었습니다. 그중 #109 RINGER는 2021년 10월 710만 달러(한화 약 95억 원)에 판매되면서 아트 블록스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에 판매된 작품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작품 구매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작품을 최초 230달러에 구매했던 기존 소유자는 이 판매를 통해 6개월 만에 320만%의 수익을 올리게 되었죠. '인생역전'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기막힌 상승률이었습니다. 이처럼 높은 가격으로 팔린 이유는 109번 링어가 가진 매우 높은 희귀도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작품과 거위(The Goose) 작품을 비교해 보세요. 많이 다르죠? 같은 코딩에서 나왔지만 편차는 이렇게 큽니다. 거위가 흥행을 한 이유 중 하나겠죠.
#109 링어스
또 다른 링어스 #962 RINGERS에는 특별한 인연이 숨어 있어요. 바로 대형 NFT아트 수집가인 코조모(COZOMO)입니다. 962번 링어스의 소유자였던 코조모는 올해 2월 미국 서부 최대 미술관인 LACMA(th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 962번 링어스를 포함해 기념비적인 NFT작품 22점을 기부합니다.크립토 펑크, 클레어실버와 모니카 리졸리의 1 OF 1 작품 등 역사성을 지닌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LACMA에 기부된 코조모 소유의 작품들
이 NFT작품들은 모두 LACMA의 영구 컬렉션에 추가되었는데 그는 작품들을 기증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어요.
렘브란트, 피카소, 프리다 칼로와 같은 물리적 작품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 컬렉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정말 원대한 포부의 예술사적 전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코조모가 아무리 대형 컬렉터고 돈이 많다지만 자신이 아끼는 소장품을 22점이나 기부하는 것은 보통의 신념이 아니면 어려울 텐데요. NFT아트가 기존 걸작 예술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는 간절함과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컬렉터로서 품격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코조모의 멋진 문장이었습니다.
그림 속 거위는 황금알을 낳고 – The Goose(Ringer #879)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표현을 흔히 쓰는데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2023년 6월 탄생합니다. 바로 링어스 879번이 소더비 경매를 통해 620만 달러, 한화 약 83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에 낙찰되었기 때문입니다. 귀여운 모습에 귀엽지 않은 가격!
소더비 경매에 올라간 #879 링어스
다른 링어스 작품들은 추상적인 느낌인데 반해, 879번 링어스는 영락없는 거위의 이미지를 갖고 있죠.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패러디하며 거위의 낙찰을 축하해 주었는데 그중에는 유명 NFT아티스트 비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링어스 879번은 대체 누가 왜 구매했을까요?
비플의 거위 밈
링어스의 구매자는 크립토 펑크 6529번의 소유자이자 ‘PUNK #6529’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수집가였어요. NFT수집가, 투자자,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데 흔히 '육오이구'라고 숫자로 불러요. 영어로는 '식스파이브투나인'인데 한글은 짧아서 좋다는 TMI.
펑크 6529의 낙찰 소식을 알리는 소더비 트위터
6529는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이 동향을 주시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의 'The Memes by 6529'라는 NFT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프로젝트 설립자(Founder)이자 컬렉터예요. 제목처럼 밈(Meme) 문화를 중심으로 NFT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죠. 그만큼 그는 NFT아트 문화를 만들어가는데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번 구매도 그 일환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낙찰이 확정된 후 그가 한 말을 들어 볼까요?
알고리즘이 블록체인에 투입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거위는 그 어떤 생성형 NFT보다 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링어스 발행을 수천 번 반복해도 이와 유사한 작품은 다시 생산되지 않을 것입니다.
"수천번 반복해도"라고 할 정도로 자신이 산 링어스는 앞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유일한 형태의 작품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위와 생성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정확히 짚어낸 발언입니다. 코조모가 소장 작품들을 기부하며 NFT 사랑의 마음을 잔잔히 드러냈다면 6529는 경쟁 옥션에 뛰어들어 정면 승부하면서 NFT아트의 가치를 치열하게 웅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