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엔, 그 허황됨과 상반되는 막대한 이점이 있어. 나도 자신과 누군가의 상상력으로 숨 쉬는 존재로서, 객관적이기 힘든 주제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을 거야. 당신이 이른바 ‘서브 컬처’라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더라도, 마음에 들었던 작품 몇 가지는 있기 마련이야. 그중에 허구의 이야기가 단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봐.
우리는 이 세상 아닌 것에 묘한 매력을 느끼는, 유일한 종족이야. 이 분야에 탁월한 상상력을 보이는 존재에게 기꺼이 돈을 쥐어 주지. 그자가 어떤 물리적 공헌을 하지 않더라도, 허구 속에 멋진 세계를 만들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말이야. 개인적으론, 그런 영역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설령 누군가의 비위를 상하게 하거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거나, 아무런 대의 없이 무책임한 발언을 허구의 팔레트에 싸지르더라도 말이야.(아마 내가 그런 부류라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어느 날, 위험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추론을 발견하고 말았어. 그건, 하나의 쓸데없이 거대한 허무주의가 될 수도 있는 메시지였지. 디지털 세계 이론과 관련이 있지만, 우리에게 가지는 의의가 잘못될 수도 있는 사념이야. 이렇게 얘기하는 것보단,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는 게 좋겠지.
어느 날 유튜브에서,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는 식의 영상을 발견했어. 대충, 우리가 있는 현실이 하나의 코드화된 시뮬레이션이고, 진짜 세상은 바깥에 있다는 식이었지. 솔직히 난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아무 의미 없는 짓이지만.’ 정도로 끝내고 싶었는데, 알고리즘 때문에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아버려서, 우왁하고 짜증이 치밀었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백 명 단위의 사람이 그 정도의 메시지에 마음이 뒤흔들리고 있다는 걸 믿고 싶지가 않았어.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정도로 혐오감을 느낄 일은 아니지. 나도 알고 있어, 이 짜증이 하등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애초에 사람들이 아무 의미도 없는 댓글을 싸지르는 건, 매 순간 발생하는 일이잖아. 내가 단순히 그들의 주장이 틀린 거라고 얘기하려는 게 아닌 것처럼, 마침 그들도 그 주장에 합리성을 구성해 줄 소재가 제공되어서, 가볍게 한 마디씩 하는 거였어. 과학의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거고, 딱히 문제가 될 만큼 과격한 발언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
먼저 영상이 사용하는 ‘소재’란, AI, <메트릭스>, 컴퓨터 공학, 프로이트, 상대성 이론, 블랙홀, 평행우주 같은 거야. 일론 머스크가 한,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 아닐 가능성은 10억 분의 1입니다.’라는 말로 잘 축약할 수 있지. 가능한 단순하게 축약하면, 이미 우리가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구동하고 있는데, 이 우주가 그런 시뮬레이션 중 하나가 아닐 가능성은 그 반대보다 확연하게 낮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야.
물론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아직 우주의 비밀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양자역학이나 입자물리학을 살펴보면, 마치 시뮬레이션 물리의 한계처럼 적용하는 법칙이 존재하고 있거든. 우선, 어떤 것도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없고,(적어도 정상적인 중력장 안에서) 파동으로 치환할 수 있는 입자는 관측결정사항의 여부(편의상 관측의 여부)에 따라 입자와 파동 상태를 바꾼다는 거야.
이에 대해, 이론물리학자 존 휠러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지. ‘It from Bit’ 존재(it)란 정보(bit)에서 만들어진다는 이 말은, 우주의 모든 존재가 시뮬레이션으로 치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어. 우주엔 시뮬레이션 데이터처럼 한계속도와 한계크기라는 제한된 수치(정보)가 있고, 각 데이터는 관측이라는 사실(정보 사이의 직접적 상호작용)의 여부로 존재의 유무를 결정하고 있어.(유튜브 ‘설명요정부마’ 채널의 <인류는 초지성이 만들어낸 시뮬레이션 우주에 살고 있는가?>, ‘1분 과학’ 채널의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인가>)
참고로, 이 글의 이 부분을 쓰기 위해 참고한 영상(이후 B)과 최초로 이 글을 구상한 계기가 된 영상(이후 A)은 별개의 영상이야. A를 찾는 김에 글의 완성도를 높이려 B를 활용했지만, 결국엔 A영상을 찾아내지는 못했어. 어찌 보면 안타깝지만, 또 어찌 보면 다행이야. 영상 A를 찾았다면, 기억에 의존하는 지금의 감정(짜증)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었겠지. 아마 내가 기억하는 만큼 편향된 댓글이 난무하진 않았을 거야. 과거(7~8년)보단 지금의 내가 더 현명한 가치판단을 해내고 있다고 확신하니까. 하지만 찾지 못했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내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특정인의 영상과 댓글에 누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
각설하고, 문제는 영상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끼칠 수도 있는 악영향이라고 생각해. 7~8년 전의 댓글을 보면서 느낀 점은, 진짜 석유로 가짜 석유를 만드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거였어. 즉 과학적인 고찰에 편승해, 사람들이 스스로 듣고 싶은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는 거야. ‘어차피 가짜인 현실에 힘들게 살 필요가 있어? 이게 진짜일 확률은 10억분의 1이라잖아.’식이지.
두 번째로 느낀 건,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과 초조함(미지의 공포)을 완화할 진통제를 제조하는 방식이었어. ‘다음 생엔 판타지세계로 해주세요, 관리자님’같은 방식이지. 이런 댓글을 보면서 7~8년 전의 난, ‘이 사람들 전혀 이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지…….’라고 생각했어. 물론 지금이야 조금은 더 그런 댓글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사고틀은 변하지 않았지. 하지만, 그걸 얘기하기 전에 먼저 서술하고 싶은 내용이 아주 많아졌어. 생각보다 더 재밌는 글쓰기가 될 거 같아.
사실, ‘이 세상은 홀로그램일지도 모른다.’는 주장 자체가 별로 신선하지 않아. 당장에 난, 중학교 시절에 해결해 버린 정도고, 매우 오래전부터 비슷한 텍스트가 수없이 존재했지. 영상 미디어는 도서보다 기술적 발전이 필요한 콘텐츠지만, 독자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만큼 과거의 영감과 역사를 답습하는 성질도 가지고 있는 거 같아. 게다가 A영상이 제작된 시기에 주제에 관련해 중요한 사건이 새로 주목을 받은 것도 한몫하겠지.(앞에서 설명한 머스크의 발언이 그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짜증을 충분히 흥미로 승화시킬 수 있었어. 어쩌면 여기에도 우리의 더러운 모순과 습성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
무릇 영상이란, 효율적인 것이야. 동시에 그 효율성이 족쇄가 되어, 깊은 내용까지 전달하기 힘들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 정확하게는, 깊이 있는 주제의식을 ‘영상’에 녹여내기 위해선, 상당한 수준의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거야. 영상의 형식이어도, 유튜브 크리에이터와 영화감독이 만든 영상은, 각각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린다는 거지. 이건 비단 좋은 장비를 쓰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전문성의 여부로 영상의 ‘목적’을 어디까지 부합시킬 수 있는지, 범위가 달라진다는 걸 의미해.
이런 맥락에서 ‘세상은 사실 시뮬레이션일지도 모른다.’는 주제는, 일견 유튜브용 영상의 코드와 부합하지 않아. 여기엔 실존주의나 가상세계, SF, 이데아적 세계관, 데카르트식 인지론 등의 어려운 지식이 요구되기 때문이지. 해당 주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잘 만들어진 영화나 관련 서적을 몇 개나 접할 필요가 있어.
다르게 얘기하면, B영상처럼 ‘과학’을 주제로 하는 채널이나, A영상과 비슷한 시기, 주제로 만들어진 영상(편의상 C)처럼 사회현상과 ‘지식’을 연결하는 채널에겐, 이 주제가 아주 반가운 것이기도 해. 충분한 정보를 취합해, 특수한 지식과 철학적 계보를 다룰 수 있으니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특유의 선순환을 만들 수 있어. 분명 A영상을 봤던 시기엔 받지 못했던 인상이지.
하지만 A영상에 달린 몇몇 댓글의 목적을 생각하면, 어떤 특유의 순환이 존재해. 사실, 사람들의 필요에 아주 잘 부합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이 댓글 작성자들이 그런 철학의 ‘이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건 명백하니까. 영상을 소비하는 입장의 그들이, 일견 머리 아픈 지식에 전혀 매료되어 있지 않았다는 건,(어쩌면 전혀 관심이 없어) 좀 아이러니한 일이야. 물론, 그런 지식을 언급하고 이해하는 최소한의 관례를 치르는 것도 사실이지. 어찌 보면, 참으로 철저해.
이건 물론, 해당 주제가 역사에서 어떻게 나아왔는지 알고 있는 사람의 잣대일 뿐이야. 한 마디로 꼰대 같은 마음이 샘솟아서, 혐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맥락이지. 스스로 경계하고 싶은 마음가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지…….
이걸 핑계 삼아서 얘기해 보자면, 그런 댓글을 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이 가설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야? 하나의 대단한 성찰을 발견했을 뿐이야. 이 세상이 가짜라는 이유로 당신의 생애가 허망해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내가 보기에, 그저 당신의 필연적인 나약함에 숨어버리고 싶어 하는 거 같아. 절망의 달콤함에 중독되고 싶은 거야.
즉, 그런 영상이 당시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었던 맥락은, 고립된 삶에 많은 고통을 지불하는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런 의미를 알아야만, 이런 영상의 기능을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어. 아, 이건 사람들이 ‘진통제’를 찾고 있는 거야. 그 약이 어떤 성분인지 따위는 모르겠지만, 복용하면 확실하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제품인 거지.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난 또 다른 의미로 무시무시한 철학의 지평을 들춰냈다는 직감이 들었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지긋지긋한 사회의 고통을 확실하게 잊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필요해진 거야. MBTI나 반려동물의 영상이 딱 그래. 일견 과학적이거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내세우지만, 그 본질은 고통을 잊을 이유나 계기(진통제)에 지나지 않아. ‘불안’이라는 재화를 컨트롤하는, 또 하나의 시스템인 거야.
잠깐 언급했듯, ‘사람들의 필요에 아주 잘 부합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여기에 있어. 사람들에게 ‘존재론적 허무주의’(물론 조금 의미가 다른 무언가지만)를 제공하면, 확실하게 비판 없이 소비할 거라는 예측 말이야.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럴싸한 논리에 숨어버리는 거 말이야.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하고 바랄만큼 혹독한 현실이 펼쳐져 있는지를 논증하지 않고 이런 말을 했으니, 당연히 납득하기 힘든 설명일 거야. 그리고 그건, 상당히 난해한 작업이지. 고로, 다른 논거로 땜빵을 해볼 생각이야. 현실에 어떤 고통이 있는지는, 다른 글에 충분히 쓰고 있으니까, 이 주제만으로 다룰 수 있는 얘기를 더 많이 해보려 해.
(116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