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세계 가설의 맹점 - 후편

주의: 114번인 전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야.


후편에선 잠시, ‘이 세상이 아닌 세계’에 대해 더 다뤄보려 해. 이 주제도 정~~말 역사가 깊지. 전편의 초반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 아닌 것에 묘한 매력을 느끼는, 유일한 종족이야.


언제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시작되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협력’이라는 행위의 시작과 깊은 연관이 있는 거 같아. 우리가 처음으로 사냥감을 같이 잡고, 남은 누군가는 열매를 채집하면서, 처음으로 ‘menpower’(인력)가 효율적으로 활용되었어. 이는 경제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잉여 자본’을 등장시켰고, 언제나 인간이 ‘현재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는 거지.


처음엔 분명, 빈약한 무언가일 뿐이야. 협력해서 사냥을 하다 보니, 남는 시간에 며칠 전 보다 사냥감이 줄어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딘가에 아직 사냥감이 많이 남아있을, 새로운 구역을 상상하게 돼. 이건 채집 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얘기지.


완력이나 지혜로 두목이 된 자는, 자신의 지위를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어지고, 돌 벽화를 남기게 하거나 종교적인 의식을 고안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지. 두 가지 모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색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임은 틀림없어.


이런 특별한 의식은, 우리가 무언가를 임의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자연스러운 발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야. 누군가는 석판에 작대기를 쌓는 것으로, 날짜나 짐승의 수를 세는 체계를 발명할 것이고, 누군가는 꿈에서 본 신기한 광경을 그려보고 싶을 거야.


우리가 채집하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게 되는 날이 올 거고, 미래에 열릴 가상의 과실을 근거로, 농업을 제안하는 자가 나오겠지. 더 많은 ‘잉여’를 여러 방면에서 만들어낼 농업사회는 자연스레, 점점 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야. supply chain(공급망)이 고도화되면서, 더 특별한 상상의 자리도 자연스레 넓어지는 거지.


처음은 주변의 동식물이나 태양신 등을 표현하다가, 지주나 기사 계급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겠지. 영웅 신화의 등장은 토테미즘이나 샤머니즘적 의미를 벗어난, ‘메시아’적 신을 등장시킬 수도 있어. 전쟁이나 귀족의 위계를 모티브로 삼는, 게임이라는 형태의 가상현실을 개발하기도 하지. 누군가는 철학적인 이상세계를 꿈꿀 수도 있고, 새로운 개념으로 세상의 순리를 정의할 수도 있다는 거야.


현재와 미래를 융합시키는 시도도 빠질 수 없지. 점점 더 다양한 계층에게 상상하는 걸 허용하면, 이 순리의 시작이 그러했듯, 너무나 색다른 미래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져. 그것은 고도로 발달한 미래일 수도 있고, 겉멋이 가득한 판타지 세계일 수도 있어. 수많은 SF와 애니메이션, 판타지가 탄생하는 황금기 말이야.


이제 우리는 그런 상상을 편리한 매체를 통해 재소비하는 시대를 맞이했어. 이의가 없는 명작을 수없이 스크린에 다시 탄생시키지. 동시에, 이 시대의 이야기를 가장 활발하게 ‘생산’하는 시기를 계속 갱신하고 있어. 여전히 연극이나 책, 노래를 활용하지만, 영화로 영사하고, DVD나 TV에 옮기고, 독자적인 게임기를 개발하고, 컴퓨터라는 기기에 코드를 입력하고, 핸드폰이라는 작은 기기에 모든 걸 압축하고, 모두에게 입맛에 맞는 미디어를 각각 송출하는 게 가능해지지.


여기서 난, 우리가 기꺼이 돈을 지불했던 산업이 포화, 쇠퇴하는 시기를 맞이했다고 감히 선언하고자 해. 좋은 얘기를 쭉~ 늘어놔놓고 미안하지만 난, 이 산업이 이제 우량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고 봐. 아주 오래된 이론인 ‘우민주의’적 시각이라고 봐도, 할 말이 없어.


다시 찬찬히 얘기를 시작해 볼게. 물론, 여전히 훌륭한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 탄생하고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야. 우리도 훌륭하게 우리 시대에 필요한 명작과 졸작을 만들고 있지. 하지만 정보의 홍수에서 점점, 그것을 정확하게 구별해 내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게 문제야. 우린 좋은 정보와 아닌 정보를 가장 골 아프게 구분해야 하는 세대니까.


이 생각을 확신하게 된 계기는, 내가 지금도 상당히 좋아하는 일본 만화계의 거대한 변화 때문이야. 그 분야가 여태껏, 얼마나 의미 있는 영역을 개척한 것과 별개로, 그것이 ‘큰 사업’이라는 일종의 레이더에 걸려버리면, 너도 나도 그 영광에 편승하려 드는 현상을 피해 갈 수가 없는 거더라고.


당연히 무슨 말인지, 감도 안 잡힐 거 같아. 이건, 만화가를 흉내 내는 나부랭이들이, 편리한 콘텐츠를 소비하려는 각박한 현대인의 구독을 긁어모으기 위해, 만화 제목에 장난질을 하는 현상을 얘기하는 거야. 몇 가지 예시를 드는 게 편하겠지. ‘몰락 예정인 귀족이지만, 한가하니까 마법에 열중해 봤다’, ‘Lv2부터 치트였던 전 용사 후보의 느긋한 이세계 라이프’, ‘30대 후반 아저씨의 이세계 통판 생활’.


이제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지? 제목만으로 모든 내용을 알 수 있는, 이 쓰레기 같은 만화의 목록을 보면서, 난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확신했어. 일본만화의 현주소나 그들의 자존심을 생각한 게 아니라, 그저 관심을 끌기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계산속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난 이런 제목이 ‘유튜브의 어그로성 썸네일과 다를 게 뭐가 있지?’라고 생각했거든. 물론 두 가지는 명백히 다른 점이 많지만, 더 많은 구독이나 조회를 위해, 더 접근하기 쉬운 자극을 생산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간의 지지로 경제, 정치적 이득을 얻어온 유구한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지만, 이건 뭔가 훨씬 더, 비합리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지워낼 수 없었어.


드디어 본론이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왔네. 내가 ‘현실은 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영상의 댓글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 딱 이거였어. 이 혐오에 대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언론의 자유, 항상 좋은 작품이나 의견이 나온다는 허황된 바람, 졸작이나 유용하지 않은 의견은 언제나 있어온 현상 등) 난 그들이 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들은 그러고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버린다고.


가상세계와 관련한 모든 것의 역사는, 그 자유분방함에 명확한 대가나 조건을 지키고 있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진리이자, 영원히 지켜야 할 철칙이지. 그건, 그 자유가 어디에서 오는지 잊지 않는 거야. supply chain(공급망)의 고도화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류가 기여해 온, 선물 같은 환경이고, 그 ‘자유’는 그런 시스템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현재는 비교적 많이 극복한, ‘아나키즘’이나 ‘이상적 사회주의’, ‘현대 샤머니즘’, ‘분열적 여성주의’조차도, 그런 원칙을 지켜온 이론이거든. 인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나름 필사적으로 고민하며 고안된 발명품이야. 그걸 활용하는 사람들이 주로, 극단으로 향하길 좋아하는 나방이라 문제가 많았던 케이스지. 오히려 이 ‘댓글’과 ‘만화 제목’의 케이스는 극단적이지만, 나서다 타 죽는 것만은 누구보다 두려워해서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무능한 무리로 보여. 나의 못난 모습을 보는 거 같아서, 괜히 화가 나.


부디 앞의 장황한 설명이 ‘허황되고 쓸모없는 가상세계’나 ‘소용없는 허무주의’를 구분해 내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어. ‘다른 세상’의 아이디어를 가치 있게 활용하지 못하는 작품이나 의견을 구분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 분명 거대한 이점으로 다가올 거야. 이 글을 완전히 끝내기 전에,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쏟아지는 정보 속에, 받아들일 것을 특히나 잘 선택해야 하는 사회에서, 이런 비정한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고 말이야.


각설하고, 드디어 이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와서 기뻐. 내가 ‘가상세계 가설의 맹점’에 빠져있는, 예의 영상에 댓글을 단 소수의 사람들과, 쓸모없는 만화나 영상을 찍어내는 크리에이터에게, 한 가지 더 설교하고 싶은 게 있거든.


물론 이미 ‘새로운 영감’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에 대해 얘기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부분의 쓴소리야. 결국엔, ‘supply chain(공급망)의 고도화’와 ‘자유의 대가’에 연결되어 있는 거지만, 당신의 삶에서 좀 더 단단한 정신을 갖추는 것과 관련한 얘기지.


그건 설령, 이 세계의 본질에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운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거야. 당신이 구구절절한 제목의 이세계 만화를 뒤적이고, 세상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에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를 모르지 않아. 그것도 깊은 역사가 있는 절망이거든.


현실은 우리가 상상한, 어떤 세계보다 지옥이야. 삶이란 건 지속해야 하는 건데, 그건 ‘고통의 인지’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야. 최소한 당신은 더 이상 건강하지 않은 시기까지, 모든 걸 깎아가며 노동해야 하고, 고통을 함께하는 동반자란, 어마무시한 행운을 요구하는 거야. 당신의 복제를 이뤄내도, 그 존재가 당신을 진정으로 보듬어줄 날은 오지 않아. 심지어 당신의 모든 건강으로 받아낸 ‘돈’이란, 실시간으로 종잇조각에 수렴하는 물건일 뿐이라, 당신의 가치와 노동을 진정으로 보존하는 물건이 아니게 될 확률이 너무나 높아.


그 밖에도 여러 비극이 있지만, 심각한 현실의 정체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 당신이 이런 숙명에 전혀 도달하지 않았어도, 거의 확실하게 찾아올 절망(당신의 ‘마모’는 필연적이니까.)에 현재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거 말이야. 바로 그것이, 당신의 관심을 ‘구독’이나 ‘조회’나 ‘댓글’로 치환해서 소비하는, 원동력이 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명심해야 하는 지식 중 하나야.


절망이 당신을 잡아먹게 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만, 적어도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는 작업’이 그런 목적으로 역사를 걸어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그런 다음은 진~짜 쉬운 정신력 키우기밖에 남지 않아. 어떤 듣기 좋은 헛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당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일 뿐이야.


이건 그저 비정하게 굴라는 말이 아니야. 이 세계가 진정으로 ‘시뮬레이션’인지의 여부나 상상하는 ‘가상의 세계’가 어딘가에 정말로 존재하는 건지 밝혀내는 것은,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당신의 흥미가 동하는 만큼, 그런 주제를 탐닉하고 추구하는 것은 분명, 좋은 업적이 될 거야. 그렇게 거의 99% 확신하는 ‘진실’이라는 것에 도달하면, 우리의 존재의의에 대한 철학을 새롭게 갱신할 필요가 생기겠지. 정말 기대되는 일이야.


하지만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어도, 절대로 깨져선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 세상이 한낱 ‘시뮬레이션’이고, 이상적인 ‘이세계’의 열화판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마음대로 절망해도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림없는 소리야. ‘절망’이란, 당신이 성장할 여지를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지,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당신은 지옥 같은 ‘이’ 세상의 일부로서, 끝까지 책임과 의무를 다 해줘야 하는 존재니까. 이 과정에서 도중에 ‘절망’의 가장 심각한 함정에 빠져, 태반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까진 인정할 수 있지만, 어딘가로 나 몰라라 도망갈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의 삶이 허술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


그래, 난 내 세계관을 당신에게 강요하고 있는 거야. 존재의 생애가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믿는 부류지. 동시에 ‘가상세계’를 관장하는 ‘예술가’의 대표를 자처하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길 바라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런 것을 제(除)해도, 이 세상이 만들어진 세계에 불과하다고 해서 절망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곳이 코드로 이루어진 허상이어도, 우리의 삶은 적어도, 우리의 ‘인지’에선 계속되는 거야. 설령 이 세계의 종말이 찾아와, 삶과 존재를 잃어도, 그저 그뿐인 일이라는 각오 정도는 필요해.


이것은 ‘종교’라는 ‘믿음’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지. ‘필멸’이라는 운명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심지’ 말이야. 우리가 다른 동식물과 구분되는 선을 그으면서 놓아버린, ‘생’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를 대신할, 무언가 말이야.


어쩌면 당신이 느끼고 있을, 존재론적인 공포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의미 없는 사념과 우행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공략이 나오고 있는 숙제란다. 조금이라도 ‘지식’이란 걸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존재가 ‘우민’이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뒤로하고, 이 허망한 사유를 벗어날, 새롭고 획기적인 개념을 발명했다고 떠드는 식의 연례행사 말이야.


내가 이번 기회에 괴상한 제목의 일본 ‘이세계’만화와 ‘세상은 시뮬레이션’관련 주제에 달리는 절망 섞인 댓글을 확인하면서,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이 있어. 그 빈약한 창작과 절망은, 마치 자신이 어떤 철학에 근거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나’의 존재를 결코 부정하는 일이 없었다는 거야.


얼핏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세계’와 ‘세상은 시뮬레이션’이란 철학에 의한, 자기부정적 세계관 속에 회피하고 싶어 하면서, ‘자신’의 본질 자체엔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는 거지. 즉, 그들의 희망사항은 이 세상의 진위여부보단, 현재의 자신보다 유리한 세계관을 상상하는 순간일 뿐이야. 철학자 데카르트가 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지.


어떤 듣기 좋은 허무주의도 너에게 철저하게 당사자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 몇 번이나 얘기하지만, 설령 어떤 진실이 밝혀져도, 당신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진실’은 각 개체에게 존재론적 변화를 야기할 만큼 철저한 것이 아니야.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이름 붙인, 모든 추상, 과학적 사고영역에 충격과 격변을 일으킬 뿐이지. 당신의 삶이 달라질 일은 없으니, 언제나 최선을 다하기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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