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청구권

우린 진정으로 ‘감정’이나 ‘마음’에 합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적어도 기계적인 의미에서, 이미 ‘감정’이나 ‘마음’에 대한 청구가 수없이 결제되고 있는 건 사실이야. ‘이자’나 ‘평균이윤율’, ‘배당금’이란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자본 리스크’라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식이지. 기본적으로 ‘계약’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행위는 불확실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관계자의 ‘배신’행위에 대한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지. 보험이나 이혼 절차 같은 것이 그래. 크게 보면 모두, 어떤 것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하는 행위야.


이렇듯, 우린 적어도 ‘금전적 배상’으로 감정의 청구권(이하 ‘마음 청구권’)을 해소하는 제도를 거의 완성한 거 같아.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어. ‘마음 청구권’이 ‘금전적 배상’에 앞서는지와 ‘감정’의 측량 및 조정 가능성이야.


‘감정’은 ‘돈’에 앞서고 있을까? 자연철학적인 사고를 가져온다면, 너무나 당연한 yes야. ‘감정’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어류의 출연부터 존재한 개념으로 보이고, ‘화폐’는 인류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우린 이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지. ‘돈’이라는 발명품이 ‘불편함’을 해소할 도구로 등장했어도, 세대를 거쳐 축적할 수 있는 ‘자본’이 어떤 사회를 만들어냈는지가 자연학적 사실보다 많이 중요해지고 말았거든.


물론 ‘돈’은 만능의 도구가 아니지만, 가장 효율적으로 ‘만능’에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이야. 이건 돈을 사용하는 개인들에게 그렇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적 상태에 가장 가까이 도착한 이념이라는 얘기도 돼.


‘돈이 진정 감정에 앞서는가?’라는 질문에 근, 현대사와 자본의 어두운 이면을 들먹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다른 걸 먼저 얘기해주고 싶어. 적어도 ‘자본’으로 ‘합의’를 볼 수 있는 ‘감정’의 청구권은 거의 완성되었는데, 이런 제도는 ‘자본 사회’의 사소한 삐걱임을 조정하기 위해 고안된 거라고. ‘자본’으로 치환할 수 없는 ‘감정’은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생각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다음 의문으로 넘어갈 수 있겠어. 역시 난 머리가 좋아. 크흠, ‘감정을 수치화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였지? 이것도 자연과학적으론 불가능한 명제야. 누구도 다른 존재의 의식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을 판단하는 행위란, 필연적으로 예측의 범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 당신의 감정도 확실히 알 수 없는 때가 많은데, 타인이 지금 어떤 감정 속에 있는지 외관적 특징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거야.


하지만, 우린 ‘알 수 없다’에 머무르는 것은, 어떤 문제도 확실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정확하겐 어떤 기준만 갖춘다면, 여남은 감정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지. ‘마음 청구권’에 대해 통상적이며 서면으로 정해져 있는 규정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감정 문제’에 대한 우리의 해법은, 거의 언제나 지킬 선까지만 지키고, 알 수 없는 논쟁이나 바쁜 일상 뒤에 숨어버리는 형태라는 거야. 소중하지 않은 타인의 ‘감정’에 크게 관심이 없어. 중요한 인물이 내게 감정을 들이민다면, 이해하는 척하며 문제가 저절로 해소되길 기다리지. 어디에도 ‘여남은 감정’에 대한 관심을 찾을 수 없어. 그렇게 수많은 감정이 버려지고, 그 허무함을 간접적으로 주워 담는 행위에 사람들이 이상한 열광을 느끼고 있지. 당신이 즐기는 취미나 콘텐츠가 당신의 케케한 감정과 어떤 연관을 가지는지, 생각해 보면 재밌을 거야.


하루에도 몇 백번이나 감정의 굴곡에 지배당하는 사람으로서 단언하건대, 세상은 외롭게 버려진, 여남은 ‘감정’의 덩어리로 가득 차있어. 분명 내 헛소리가 전혀 이해되지 않을 거야. 이제 우리가 흔히 알만한 얘기를 시작하도록 할게. 우리가 파트너나 배우자에게 느끼는, ‘사랑’이라는 관념 말이야.


항상 사랑을 개떡같이 해 온 나의 역사 때문인지, 난 상대방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와, 그런 상처를 회복하는 사례에 각별한 관심을 쏟게 된 거 같아. 아까도 논증했듯이, 우린 상대방의 마음이나 감정에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어. 그런 수많은 ‘심증의 상태’는 사랑의 불균형을 만들어내지. 어지간한 노력과 이해를 시도하지 않는 한, 서로가 상대방에게 향하는 감정의 양이나 정체에 대해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내가 사랑하는 만큼 돌려받고 있는 건가?’ 진정한 소중함에 도달한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 심리가, 측정할 수 없는 ‘감정 청구권’을 달러처럼 찍어내고 있어. 그런데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소원함이 청구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란, 너무나 개인사적인 문제로 느껴지는 것도 현실이지.


이렇듯, 전혀 배상받지 못하는 청구권이 하루에도 억 단위로 생성되고 있을 거야. 솔직히 이런 것들이 공적으로 보상받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효율적이고 골치 아픈 일이겠지. 아마 방법론에 있어 어떤 뾰족한 성과도 얻지 못하겠지만, 꽤나 흥미로운 발견을 해낼 수는 있어. ‘마음 청구권’과 ‘채권’을 비교론적으로 분석하는 거야.


상당히 뜬금없는 전개지만, 이왕 ‘청구권’이라는 경제개념을 사용한 김에, 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먼저, 금본위제에서 발행하는 ‘금 채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볼 생각이야. 금본위제의 상황에서, 금을 보유한 A가 광활한 토지 a를 구매하고 싶다고 생각하자. 직접 소유주인 B와 ‘금’을 주고받는 거래를 할 수 있지만, 워낙 대량의 금을 옮기는 작업이라 비용이 만만치 않고, B의 입장에서 금의 순도가 의심스러운 것도 어쩔 도리가 없지.


여기서 금본위 거래에 전문인, C은행이 등장하는 거야. C은행은 기다렸다는 듯이, A와 B에게 3자로서의 거래 중재를 자청하지. 이는 세 사람 모두에게 이로운 거래가 될 수 있어. A와 B는 금의 이동과 보관에 필요한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지. C은행의 전문가가 금의 순도를 측정해 줄 거니, 신뢰의 문제도 크게 해결되었어.


중요한 건, 이 거래의 결과로 각자의 자본이 어떻게, 어떤 형태로 이동했는가를 확인하는 거야. A는 막대한 금을 대가로, 광활한 대지를 얻었어. B는 대지를 대가로, 막대한 금의 권리증서(소유권이나 청구권이라고도 할 수 있어)를 얻어냈지. C은행은 짭짤한 거래 수수료와 실제 금을 보관, 관리하는 특권을 얻었고.


여기서 뭔가 이상하지 않아? 왜 A와 B의 금 보관 방법이 달라졌을까? 왜 B는 금을 직접 보관하지 않고, 종이 증서에 기뻐하고 있을까? 왜 C은행은 금의 보관비용을 걱정하지 않는 걸까? 이제 무언가를 화폐로 지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줄게.


이 사례는 ‘금 본위제’ 가정 하에 성립하고 있어. ‘금 본위제’는 쉽게 말해, ‘금’ 그 자체를 화폐로 취급해서, 시장에 직접 유통하는 제도를 말해. 이 사례는 ‘금 본위제’의 거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간단하게 보여주고 있지. 최초 ‘금’ 소유자가 있고, ‘금’이 다른 ‘재화’와 거래돼. 그러다 보면, 모두가 ‘금 순도’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금 거래’ 전문가가 등장하지.


‘금 본위제’ 사회에서, 그런 전문가는 국가 주요 은행, 산업과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고, 국가는 자연스레 ‘금’이라는 화폐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방법을 모색하게 돼. 결과, 국민 간의 ‘금’ 거래를 모니터링,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지. 슬슬 이게 경제이론에 알맞은 설명일지 자신은 없지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부분을 계속 얘기해 볼게.


아까도 얘기했듯, ‘금 본위제’라는 이론은 ‘금’을 화폐로 지정하는 제도야. 하지만 내 사견으로, 어떤 것을 ‘화폐’로 지정하든, 그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완벽한 ‘화폐’의 기능을 수행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아.(적어도 근대까지 발생한 모든 화폐를 의미해) B의 ‘금 소유 증서’처럼, 화폐 사용자는 보유한 ‘화폐’의 가치를 증명하는 증서를 교부받고, 일종의 채권 발행자인 ‘은행’이나 ‘국가’의 시스템에 ‘금’을 귀속하는 거야. 실물인 ‘금’의 실질적 이동이 은행이나 국고에서 0인, 무한 신용 발권의 경제를 완성할 수 있지. 은행이나 국가에서 실질적으로 ‘금’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근간으로 새로운 ‘채권’을 발행한 ‘투자’나 ‘대부’사업을 진행할 수 있어. ‘금 본위제’의 ‘금’은 자석처럼 ‘은행’과 ‘국가’에 집결하는 거지.


혹여나 오해할까 하는 말인데, 내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염세주의나 아나키즘에 있지 않아. 물론 나름 좋아하는 것들이지만, 오늘은 전혀 다른 얘기를 위해 필요한 설명이거든. 처음에 우리, ‘마음 청구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잖아. 이제 이 뜬금없는 경제 수업의 이유를 알려줄게.


우린 어쩌면, ‘금 본위제’처럼 ‘마음 본위제’를 구성할 수 있을지도 몰라. 물론 미친 소리지. ‘금’은 부정할 수 없는 실물인데, ‘마음’은 형체를 가지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미친 소리가 아니라는 걸, 방금까지 설명했어. 사실상 한 번만 신용의 장벽을 통과할 수 있다면, ‘마음’도 ‘금’처럼 장부 형태의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물건이 돼!


분명 초반에 ‘감정을 수치화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나 ‘돈이 진정 감정에 앞서는가?’라는 의문을 설명해 놓고, 무슨 변심이냐 싶을 거야. 놀랍게도 난 전혀 변심하지 않았어. 오히려 이제야 통상적인 의견에서 벗어난, 나만의 해법을 얘기할 생각에 흥분하고 있지.


‘감정을 수치화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와 ‘돈이 진정 감정에 앞서는가?’는 단 하나의 전제로 함께 묶어버릴 수 있어. ‘감정과 돈은 관념이나 현상에 불가하다.’는 거야. 각 개념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 때문에, 우린 두 개념 간에 다른 종류의 가치판단을 들이밀고 있었다는 거지.


쉽게 얘기해서, ‘돈’은 ‘마음’보다 비교적 실질적이기에, 수치화의 범주에 넣어왔단 거야. 그런 수치화 이후에 제도적인 결정을 하는 방식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돈’이 때로 ‘마음’에 앞서는 사회현상을 쉬이 야기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사실 두 관념의 본질 사이엔, 수치화의 필연성이나 우열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아. 그저 세상이라는 퍼즐을 푸는, 다른 모양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거야.


물론 여전히 ‘돈’이 사회에서 발명된 현상인 거나, ‘마음’을 수치화하는 등의 문제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지. 이런 수많은 문제를 어느 정도 설명하기 위해, A, B와 C은행의 예시를 가져온 것도 있어. ‘금’은 최초에 A가 보유했던 실물이지만, C가 발행하고 B가 보유 중인 ‘금’의 권리증서는 어떻지? ‘종이 증서’를 얼마나 구체적인 실물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면, 수많은 여신거래를 만들어낼 물건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거지?


이건 ‘화폐’라는 발명품의 본질적인 특성과도 관련이 있어. 전문 분야는 아니라서 만족할만한 설명을 해내진 못하지만, ‘화폐’라는 사회현상은 어느 정도 고도화되면, 가치의 근본이 되는 ‘실물’과는 동떨어진 물건이 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 난 이게 ‘자본사회’의 ‘시장’과 ‘체제’의 고도화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보는데, 오늘의 주제는 이게 아니니까. 요점은, 어딘가에서 청구될 주체의 가치가 반드시 실물에서 기인할 필요가 없는 경제체제는, 이미 태연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거야.


한 가지만 사례를 더 보면, ‘비트코인’이 있지. 이것의 이론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도 좋지만, 요점은 디지털적 ‘정보’로만 존재하는 ‘화폐’가 오히려 완벽하게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되었단 거야. 그것에 어떤 실물적인 측정도 할 수 없지만(가격, 채굴과 관련된 수치 외에), 그 자체로 거래 장부인 디지털 데이터가 이론적으로 가장 완벽한 ‘화폐’로써 활약할 시대가 곧 도래할 거야.


꽤나 ‘비트코인’ 신봉자 같은 얘기를 꺼내고 말았어. ‘마음 청구권’으로 다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인간의 ‘감정’을 일견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청구’해도 크게 문제가 없는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청구’되는 ‘이혼 소송’이나 ‘유공자 보상’의 틀도 있지만, 훨씬 디테일한 곳에서도 이 이론을 적용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이 아이디어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어. 적어도 우린 ‘정신적 상태’에 대해, 훨씬 더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아. 결국 처음부터 제기했던, 가장 껄끄러운 문제로 돌아왔을 뿐이야. 다른 ‘화폐’나 ‘토지’만큼 정량을 확실하게 표기할 필요까지 없다는 걸 겨우 밝혀냈지만, 아직 우리가 ‘마음’을 구체화하는 수단이 많이 못 미치고 있다는 얘기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유용한 격언이 생각나네. 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정말로 한 길 정도라고 생각해.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혜로, ‘마음’을 필요한 만큼 수치화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는 거야.


이를 위해 어떤 방법론을 생각해도 좋아. 더 주변에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좋겠지. 이미 뇌파연구는 ‘마음’이 받는 실재적 대미지를 잘 측정하고 있어. 지금도 시행하는 수많은 보험이나 계약위반의 범위를 조금만 더 늘려서, 인간이 생각보다 더 세심하다는 것을 금전적으로 학습하는 것도 방법이야.


관련해서, 내가 점찍어 놓은 방법론도 소개해볼까 해. 우리의 뇌가 커진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이론이야. 뇌의 용량이 우리 인류만큼 비대해진 유인원은 생각보다 여러 가지 있었다고 해. 그중엔 우리보다 더 뛰어난 두뇌를 가진 종도 있었다지. 하지만 결국 우리 ‘호모 사피엔스’만이 지구에 서있는, 유일한 인류가 되었어.


몇몇 뇌 과학자들의 의견은 이렇대. 우리의 뇌가 다른 개체의 감정 변화를 잘 감지하도록 진화했다고 말이야. 그런 ‘공감’의 가능성 덕에, 가장 기초적인 ‘manpower’(인력)를 집중시키는, 복잡한 작업이 가능하게 됐다는 거지. 다른 개체와 비교적 깊이 있는 ‘교감’이 가능해지면서 집단 사냥, 공동 육아, 농사 협력, 촌락 형성 등에 거대한 이점을 얻었다는 이론이야.


이 방법론을 한 번 활용해 보자. 중간에 잠깐 얘기했던, ‘세상은 외롭게 버려진, 여남은 감정의 덩어리로 가득 차있어.’라는 언급처럼, 우린 생각보다 쩨쩨하고도 중요한 이유로 널브러져 있는, 타인의 감정을 조금씩 주워가는 연습을 해야 해. 게다가 이미 우리는, 그런 ‘공감’능력에 특화된 존재야. 물론 전보다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정도로, 사회라는 것이 복잡하고 차가워진 것도 사실이지.(그렇기에 우리 뇌가 충분히 피곤한 상태라, 필요 이상 타인의 ‘감정’을 살피는 것을 멀리하는 사회가 형성된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사소하고 귀여운 이유로 사람들이 절망하고, 의심하고, 경원해진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해. 당장에 내가 ‘마음 청구권’이라는 개념을 고안한 것도, 그런 알량한 필요 때문인걸.


정말로 처음엔, 이런 식으로 장황하게 이론의 가면을 쓸 생각은 아니었어. ^^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기껏해야 실패한 사랑에 대한 한탄이었지. 한시적으로만 사랑했던 것이 화가 나서, 사랑에도 ‘비정규직’이 있다고 생각한 게 최초였어.


이런, 일종의 ‘피해의식’은 스스로 과격한 포르노를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였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까, 스트레스성 과식처럼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말이야. 어쩌면 정말, 이 논리가 나의 정답일지도 모를 일이네. 한동안 ‘마음’은 그 누구도 보상, 보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음, 우울한 시절이었지.


그 밖에도 흑역사가 될 만한, 비청구된 ‘마음’의 표현을 남아있는 기록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엌ㅋㅋㅋ. 어떤 땐, 그녀에게 날 좋아하게 할 만한 행동을 못해냈기 때문에(어떤 보상을 바란다는 수식을 위해 필요한 조건인, 수여행위의 존재), 이 사달이 났다는 식의 수식을 만들어내기도 했지. 분명 ‘문제’는 나에게 있지만, 사실은 그녀에게 있다는 음침한 핑계를 찾아내는 공상들이라니……. 참, 부질없다 그지?


덕분에 자신이, 그렇게 수만의 환상을 만들어낼 정도로, 스스로 ‘사랑’과 ‘관심’이 너무나 고픈, 귀여운 존재일 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지. 여기까지 생각하니, 난 모두의 청구되지 않은 ‘마음’과 ‘사랑’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어. 그 탓에 이렇게, 또 하나의 이상한 헛소리를 구성하고, 수집했을 뿐이야. 부디 온 세상에 떠도는, ‘청구되지 않은 마음’을 헤아려주기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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