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유튜버 ‘카라미’란 사람의 한 영상에서 힌트를 얻은 거야. 이 사람은 <유희왕> 카드 게임 국가 대표 격인 사람인데, 카드 게임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러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인, ‘불가항력’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어.
‘불가항력’이 무엇이냐? 내가 해석하기에, 어떤 표면적 압박 없이도 상대방의 행동을 심리적으로 제한하는 모든 행위야. 카드 게임에선 ‘블러핑’을 대표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 내가 실제론 해당 패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가장 두려워하는 패를 가지고 있는 척하는 거 말이야.
물론 이게 다가 아니지. 카라미가 영상에서 언급한 예시를 풀어서 설명해 볼게. <유희왕>은 보통 각종 테마의 카드와 범용 카드로 덱을 구축해서, 상대의 ‘라이프 포인트’를 0으로 만드는 게임이야. 각 테마의 카드는 그들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어서, 그 특성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여 범용 카드와 조화를 이루는 덱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지. 물론 여러 테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상대방 덱의 특성도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중 ‘드래곤메이드’라는 테마는 카드 효과 텍스트만 보면, 그렇게까지 상대에 대한 억제력이 강한 덱은 아니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강력한 덱이라 평가받고 있지. 그 이유에 대해 카라미는 이렇게 설명해. 이 덱이 ‘불가항력’ 쪽이 강력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드래곤메이드’의 테마 특성상, 상대 입장에서 전투를 통해 몬스터를 치운다는 선택지가 사실상 사라지기 때문에, ‘드래곤메이드’ 몬스터를 치우기 위해선 효과로 직접 몬스터를 제거하는 종류의 카드를 억지로 꺼내올 필요가 생긴다는 거야.
<유희왕> 같은 TCG 장르를 잘 모르는 분들에겐 미안한 전개지만, 마저 설명하도록 할게. ㅎㅎ ‘드래곤메이드’ 덱 플레이어 입장에선, 상대방이 제거류 카드를 뽑는 과정을 방해하는 범용 카드를 채용하여 게임을 쉽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거야. 카라미는 이 예시를 마치면서 이렇게 얘기해. ‘불가항력’이란 ‘상대 입장에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상대의 선택지를 좁히는 모든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
<유희왕>이라는 카드 게임은 일반적으로 강력한 카드를 잘 플레이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자 고유한 특성을 가지는 테마의 ‘불가항력’을 잘 활용해야 정점을 찍을 수 있는 게임인 거 같아. 카라미는 이렇게 얘기하지.
“여러분들이 덱을 생각할 때, [불가항력]을 고려하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고려를 안 해요. (중략) 심리전이라고 보시면 되죠! 하지만 ‘불가항력’이 심리전보다 개념의 범위가 넓어요. 실제로 몇몇 경우, 상대방 입장에서 절대 할 수 없는 플레이를 조성할 수 있어요. 상대가 만약 그 플레이를 한다면, 실력이 낮다고 판단될 정도로! <유희왕>을 잘하면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을 역이용해서 게임을 풀어가는 거죠. (중략) 그래서 잘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잘한다는 인식이 깔린 순간부터 ‘불가항력 덩어리’가 됩니다. 상대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어요.”
조금 더 영상을 인용해 볼게. <유희왕> 환경에서 특정 카드가 플레이에 강력하게 의식되는 환경이라면, 누군가는 그 카드 대신 다른 카드를 넣고 게임에 임해도, 그 카드를 가지고 있는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거지! 이런 건 정말 ‘불가항력’의 묘미인 거 같아.
참 재밌는 일이야. 게임에서의 ‘불가항력’은 나도 어느 정도 느껴왔거든. 흔히 심리적으로 상대방의 선택에 제약을 거는 건,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니까. 만약 3~4명이 동시에 플레이하는 게임이라면, 나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서로를 견제하게 유도하는 게 효율적일 거야. 상대방에게 나라는 선택지를 지우고, 나머지 플레이어에게 집중하게 하는 방식 말이야.
더 재밌는 건, 불가항력이 게임 중에 이렇게나 중요한 요소임에도, 자체적으로 플레이어가 더욱 잘 고려하기 힘들어진다는 사실이야. 카라미가 말했듯이, ‘불가항력’을 고려한 덱을 만들어봐야 하지만, 대부분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지. 설령 ‘불가항력’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더라도, 그 사실 자체 때문에 플레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요물이지.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을 거 같아. 게임에 국한에서 생각해 보면, 숙련도의 문제가 가장 크겠지. 어느 차원까지 자신의 실력을 인지하고 갈고닦아왔는지 말이야.
어떤 게임이든 결국 사람을 상대하는 거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른바 ‘판수’라는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처음 어떤 게임을 접하면, 사람은 ‘게임’ 그 자체의 룰과 구조를 익히게 되잖아. 이미 그것만으로 벅찬 경우가 대부분이야. 자신처럼 ‘게임’을 공부하는 인간을 고려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란 거지.
하지만 ‘불가항력’을 이용하는 존재는 인간이야. ‘불가항력’은 게임의 구조로 의도적으로 내재하기 마련이지만, 그 의도 자체도 인간이 만들어야만 존재한다는 걸 이해해야 해. 그럴 수 있다면, ‘게임’이란 것은 룰이 다양하게 다른, 비슷한 퍼즐이라는 걸 알게 되지. 어떤 게임이 대단한 명작인지는, ‘[불가항력]을 인간이 어디까지 교묘하게 이용할 수 있는가’로 판단할 수 있을 거야. 그런 판단력은 수많은 경험과 고민으로 차차 쌓이기 마련일 거고.
여기서 생각해 보면, 이런 ‘불가항력’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거 아닐까? 나도 카라미가 얘기한 ‘불가항력’이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세상이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
세상의 ‘불가항력’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해. 그 이유가 본능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어떤 존재도 본능을 거스를 수 없으니, 가장 넓은 의미의 ‘불가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에너지와 유전자의 범주지. 물론 아까까지 얘기한 ‘유희왕’의 경우와는 너무나 다른 의미로 말이야.
사회적인 이유로 생기는 ‘불가항력’도 크게 다르진 않아. 사회는 세상의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사회가 만드는 ‘불가항력’도 근본적으로 에너지와 유전자의 범주에 벗어나진 않거든.
하지만 우린 그 세부적인 방식을 변화시키면서 발전해 왔단 말이지. 예전엔 대부분의 구성원이 식량 생산에 종사해야 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즉, 우리가 역사를 통해 유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불가항력’을 사회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거야. ‘규범’이나 ‘문화’라고 생각해도 좋겠어.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난 예전부터 동성 친구를 대하는 남녀 아이들의 태도가 너무나 다른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어. 여자아이끼리는 서로 손을 잡거나 귀엽게 부르는 것처럼, 연인 사이에 기대되는 행동에 어느 정도 관대한 부분이 있는 거 같아. 하지만 남자아이끼리는 그런 행동이 잘 성립되진 않아. 같은 행동이라도 여자끼리면 잘 노는 거고, 남자끼리면 게이 같은 행동이 되어 버리지.
다른 예시는 훨씬 억지스러운 거야. 난 20대 후반에서야 탁구에 대한 직업적인 열망을 확신할 수 있었지. 하지만 이미 그 길을 선택하기엔 너무 많은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야. 20대 후반에 취미 이상의 탁구를 시작할 수 있는 길은, 내가 알기로 존재하지 않거든. 이미 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해 버린 거야.
물론 아무 소용도 없는 한탄이야. 심지어 취미로써의 탁구에도 힘쓰지 않는 입장에서, 절대 남에게 하소연할 거리도 되지 않지. 내가 하는 말은 전부 핑계일 뿐이야.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인 ‘불가항력’이 그냥 싫어서, 자신의 의지 부족을 숨길만한 위안을 찾는 거지.
하지만 비슷한 처지여도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는 ‘불가항력’도 있어. 20대 후반까지 난 운전면허도 따지 않았지. 정말 대책 없이 마음대로 놀고먹은 청춘이야. 그래도 운전면허는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는 관문으로 남아 있어. 운전면허의 선택 여부도 자유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유용한 생활의 기술이니까. 즉, 운전면허는 내게 다른 불편한 ‘불가항력’을 획기적으로 덜어줄 수 있기에, 강력한 ‘불가항력’으로 작용하는 거야. 난 언젠가 운전에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운전하고 있겠지.
탁구와 운전은 너무 다른 거라, 이 둘에게 다른 크기의 ‘불가항력’이 작용하는 거야. 남녀의 차이처럼 말이야! 하지만 이 나이에 직업적인 의미로 탁구를 시작하는 것과 자신의 신념대로 운전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까지 다른 건지, 난 세상에 너무 회의적이라 모르겠어. 물론 다르다는 걸 알지만, 내가 평생 믿어온 나의 직감은 다를 이유는 없다고 속삭이고 있어. 미칠 노릇이야. 둘 다 똑같은 정도의 미친 짓이거나,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일 수 없다는 게…….
결국, 내 맘대로 떼를 쓰고 말았어. 좋은 글을 목표로 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글쓰기야. 이왕 저지른 김에 한술 더 떠도 될 정도지. 왜 난 게임의 ‘불가항력’은 그렇게 좋아하면서, 현실의 ‘불가항력’에 이렇게나 찡찡대고 싶은 걸까? 왜 현실의 ‘불가항력’을 잊기 위해 게임의 ‘불가항력’을 덧씌우는 걸까? 아마 ‘불가항력’에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냐고 믿을 수 있는 장치 때문일 거야.
현실의 ‘불가항력’은 그럴 수 없지만, 게임의 그것은 내 마음대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적어도 원칙적으로 말이야. 내가 실력이 없다고 판단될 정도로 그 게임의 ‘불가항력’에 약하다면, 그만해 버리면 되니까. 다시 0부터 ‘시작’하는 비겁한 마음을 누릴 수 있는 거지. 손쉽게 다른 판에서 유리한 ‘불가항력’을 누릴 수도 있는 거니까. 현실에선 그런 장치가 지극히 한정적이라, 사람들이 무언가에 쉽게 중독된다고 생각해. 게임의 이름을 가진 도박이나 손쉬운 행복을 준다는 약물 같은 거 말이야.
이 글의 의미를 하나라도 찾아보자면, 카라미의 말로 돌아올 수 있을 거 같아.
“여러분들이 덱을 생각할 때, [불가항력]을 고려하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고려를 안 해요.”
적어도 난 ‘불가항력’이 왜 어렵고 고려하기 힘든 것인지 아주 조금 밝혀낸 거 같아. 거스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힘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