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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기적 의무 – 소설 상상

조금이라도 SF를 사랑한다면, 자신만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을 상상해 보는 법이야. 그런 세상이 온다면, 나라는 존재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상상해 보고 싶더라고. 조금은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난 그런 세상의 무력한 노인일 가능성이 커. 아니, 그전에 삶을 포기하거나 사망할 가능성이 높겠지. 난 점점 각박해질 인류의 생존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야. 생존 요령은 둘째 치더라도, 격해질 경쟁 속에 살아남을 만큼 생존에 열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 거니까.


이래선 작품을 상상할 수 없으니까, 내 삶에 강력한 이유를 만들어야겠어. 물론 나를 대변하는 인물 없이 구상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상상하는 세상 속에 내가 없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잖아. ㅎㅎ 난 동생 핑계를 대기로 했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내가 가정을 꾸려 자식을 낳을 일은 없을 거고, 30년 후에 펼쳐질 각박한 세상 속에 부모님의 고통을 생각하긴 싫으니까.


죽은 동생의 딸을 어떻게든 키워내기 위해서라면, 나라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아. 물론 몇 가지 더 희망적인 설정을 추가해야겠지. 내가 무질서한 세상에서 다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선한 집단을 만나는 거라던가, 내가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만큼 실력 있는 녀석이라던가, 그들이 나의 소설을 좋아해 줄 거라는 등의 있을 수 없는 일들 말이야.


뭐, 실제로 보여주는 게 가장 빠르겠지. 몇 가지 소설의 상황을 적어볼게.



난 부나 지위를 물려받는 미래를 돌려받진 못했어. 우린 이제 아무것도 보장받지 않아. 더 깊고 영원한 의미로 그렇게 되었지. 이건 아마 미래 기술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는, 맹목적 믿음의 반동이야. 거대한 대가를 치른 거지. 이젠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며 발전하는, 국가 단위의 인류는 없으니까.


동생과 부모를 잃었지만, 난 정말 운이 좋았어. 내 옆엔 동생의 딸이 있었고, 내가 흘러 들어간 조직의 선대 두목은 인류의 마지막 성현이었으니까. 그는 ‘조직’ 단위로만 생존할 수 있는 폭력적인 인류에게도 여흥이 가장 중요하단 걸 꿰뚫어 보았지. 여전히 우린, 목숨으로 영역을 뺏고 빼앗기는 불한당이지만, 그가 고안한 시스템 덕분에 반드시 파괴하지 않는 성역을 확보할 수 있었어. 그 업적 덕분에 기술자는 물론이고, 나 같은 작가나 예술가들도 폭력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거야.


정말 기적 같은 일이지. 당장 어제 총을 겨눈 조직이라도, 작가나 화가의 작품을 공유하고 감상하는 데엔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있어. 대부분의 구성원이 극한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사회이기에, 끊임없는 불안을 달래줄 안정제가 꼭 필요했던 걸지도 몰라. 선대 영감이 내가 조카 다음으로 소중히 하는 USB의 내용물을 부하들에게 보여주겠다고 할 때도, 그걸 다른 조직과 공유하자고 할 때도, 난 그런 미친 짓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인류는 사실 그걸 바라고 있더라고…….


이제 대부분의 조직이 이런 ‘여흥’이 필수적이라고 인정하고 있어. 다른 조직에 완전히 승리해도, 뺏을 수 있는 건 지배계층과 저항자의 목숨, 그리고 새로운 피지배자의 노동력뿐이야. 특수 계급이 유지해 온 기술과 예술, 문화는 어떻게든 지켜내지. 그것이 우리가 아직 인간이란 걸 확신하게 해 주니까. 물론 사라진 조직의 영광을 숭배하는 아마추어는 즉각 처단당하는 구조로 말이야.


기술자를 제외한 특수 계층은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절반 정도의 일만 수행해. 나머지 시간은 각자의 창작 활동에 열중하지. 기술자는 어떻게든 유용한 물건을 늘리고 유지하는 사람들이야. 점점 더 한정되는 자원을 컨트롤하는 열쇠지. 음악가는 기술자와 연계해서 이 시대의 음악을 만들어내. 주로 노동요나 전투 음악에 활용되지. 쉬는 시간에 마침 음악가가 있다면, 간만에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거야.


물론 장치에 음악을 저장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계속 틀어놓는 건 정말 특별한 순간만이야. 노동요를 튼다는 건 있을 수 없고, 전투 음악도 우두머리 수준의 전투가 아니곤 힘들어. 대부분은 구전이나 아날로그식의 기록에 기대어 공유하는 음악이라고 봐야지. 악기를 소지하고 다룬다는 개념도 흔하지 않아.


전기는 가장 소중한 자원 중 하나야. 오직 전등, 단체요리, 대중교통, 전쟁에만 활용할 수 있지. 물론 손전등용 전지를 과거의 유물에 사용하는 건 심각한 범죄행위로 취급받고 있어. 다만 그렇게 기계를 활용할 수 있는 자는 기술자 계급으로 영입되어, 벗어날 수 없는 통제 속에 살아야 하지.


식량은 과거의 위대한 기술력 덕분에 부족한 수준을 겨우 면할 수 있어. 물론 개인차야 있지만, 다들 체형이 왜소하고 홀쭉하지. 좀 어깨가 넓거나 뱃가죽이 늘어진 건 과거 세대의 생존자나 지배층 정도야. 아이를 가져도 두 명이 현실적인 한계고, 심각한 장애가 있는 아이는 바로 한 줌의 흙으로 돌려보내지. 그가 살아간다는 건, 부모에게도 본인에게도 괴로운 일이니까. 우린 그만큼 열악해.


이 때문에 가능한 높은 수준의 단체 식사를 만드는 영양사도 특수 계급 취급을 받아. 흥미로운 건, 아무도 그들을 ‘요리사’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거지. 그들은 최고로 효율적이면서 먹을 만한 수준의 음식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맛의 극의를 다룰 수 있는 ‘요리사’는 대부분 영양사가 되거나 노동계급이 되었어. 그들 중 몇 명만이 지배층이 먹을 특식을 만들고 있지.


특수 계층에의 대우는 좀 특별해. 조금일지라도 남들보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 때로는 간부급과 동등한 예우를 받지. 주로 각 분야의 오야가 되는 사람들 말이야. 그들 중에 지식층은 두목의 스승이나 책사를 겸하는 경우도 흔해. 누군가는 날 질투할 거라 생각하지? 틀렸어. 모두가 날 질투하고 있거든. 모두 내게 친절하지만, 은근한 부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게 이곳의 중요한 관습이야. 난 사람들의 은근한 일상 스트레스를 맞이하는, 샌드백에 가까운 존재지. 대부분은 다음 소설을 더 잘 써달라는 희망 사항의 압박이야. 모두가 자기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원하고 있으니까. 다음 소설에는 젊은 여자를 더……, 꽃미남 캐릭터는? 화가랑 같이 일러스트를 그리는 거예요! 아름다운 커플의 얼굴을 더 잘 상상할 수 있게!


게다가 모두 날카로운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어. 즉, 인간에게 꼭 필요한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밖에 필요한 어떤 것들(주로 소설이나 그림)에 대해서는 생산적인 노동이 아니라는 합의가 아주 깊이 깔려있지. 고로, 그들이 내게 던지는 비아냥은 매우 현실적인 거야. 난 그게 싫지 않아. 아주 마음에 들어. 조금 스트레스를 받지만, 지금의 인간에겐 그게 가장 잘 맞는 체계인걸! 난 그들이 더 잘 생산하고 약탈하기 위한 윤활유 같은 거야.


여담이지만, 특히 음악가나 화가의 수명은 길지 않았어. 가장 그런 상상력을 발휘하는 시기와 노동을 잘하는 시기가 겹치기 때문이겠지. 작가와 이야기꾼은 사정이 훨씬 나았지만, 예술가들이 본격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시기는 의무 노동량이 획기적으로 적어지는 4~50대 이후라고 보면 돼. 아니면 전 시대의 아이돌처럼 활동할 수 있었지만, 거의 100% 단명하는 선택이었지. 아무튼 오늘날도 버티며 살아남은 예술가만 인정받을 수 있어.


이런 예외적인 것들 외에는 단 한 가지의 절대적인 원칙이 있을 뿐이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직 강하고 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조직만이 예외라는 특혜를 누릴 수 있어. 어찌 보면 아이러니해. 인간이 세상 생긴 대로 사는 방식으로 세상에 없던 걸 누리려 하고 있어. 또 그게 정말 세상이 생겨먹은 방식인 건지, 예외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로 세상엔 없던 거였는지 난 점점 알 수가 없어.


물론 이런 생각을 밖으로 내보인다는 건 아니야. 예전에도 그렇게 살아왔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래야 하지. 지금은 폭력의 시대일뿐더러, 아무도 지배층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세상이니까. 모두가 거대한 불편을 감수하고 있지만, 자신이 누리는 편의가 지배층의 힘으로 만들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 그들은 사회 전반에 영향력이 있는 군대 조직이야. 모든 자원과 아이디어가 그들을 중심으로 순환하고 있고, 그들의 힘은 순수하고도 스타일리시하며 절대적인 수준이어야 해. 그래, 그들은 정말 <매드맥스>처럼 총과 오토바이로 전쟁을 치르고 있거든.


가장 강한 조직의 특별계층인 난, 이런 무법 세상을 잘 실감하지 못해. 이건 마치 21세기 초의 환경문제를 대하는 인류의 모습 같아.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내 눈앞에 가장 큰 문제는, 나에게 질투와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출하는 다른 계층에게 내 복잡한 속내를 들킬까 전전긍긍하며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뿐이니까. 작품을 쓸 때도 마찬가지야. 예전처럼 원본 그대로의 생각을 적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지. 반드시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 해. 아, 이건 바뀌지 않았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상황을 설명해 볼게. 어느 날은 전투원 말단 녀석이랑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작가님! 다음엔 죽여주는 누님이 등장하는 소설을 써주십니까? 작가님 여주들은 뭔가 가슴이 작을 것만 같아서요!”


우스운 말이지만, 제법 놀라운 추측이었어.

“아, 벌써 <바이킹 걸> 첫 화가 자네 차례까지 돈 건가? 점점 빨라져서 좋군.”

녀석은 그만 놀리라는 식으로

“이건 전리품으로 얻은 거예요! 그리고, 전혀 대답을 못 들었습니다!”

ㅎㅎ

“뭐, 난 일부러 가슴 크기를 말하지 않은 거야. 그건 네 상상에 달려있거든.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섹시한 여자와 내용 사이에 타협하면서 읽는 거지.”

이 정도 말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라니…….


“전 그렇게 머리 아픈 건 몰라요! 그냥 가슴이 큰지 작은지 슬쩍 말해주면 안 됩니까?”

ㅎㅎ

“정 그렇게 원한다면, <바이킹 걸> 다음 회를 수정해 줄게.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난 모르는 일이다?!”

“아니, 아니! 그건 아니죠! 그것만은 봐주세요. ㅠㅠ”



그리고 이건 선대 두목이랑 술을 마시며 나눈 대화야. 그는 나보다 한참 어른인데도 허물없이 나를 대해줬어. 그만큼 그는 날 참 많이 아꼈지.


“하나만 물어보자. 인간을 혐오하면서 모두에게 잘하려는 이유가 뭐지? 우린 서로를 죽이는 무법자야. 심지어 네 책을 사 가는 놈 중엔, 네 가족을 죽인 놈들의 패거리도 있다고!”

인간이 싫은 만큼 좋기 때문이죠.


“근데 알아? 그 생각은 이기적이야! 듣기 거북할 정도로 좋아 보이는 말이라고.”

이렇게 끔찍해도 우리의 가족을 숨 쉬게 했던 것이 사회니까요. 저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지만, 현명한 사람을 흉내 내고 싶거든요. 부모님이나 부처처럼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무 대가도 치르고 싶지 않았죠. 노력 없이 내가 동경한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지금 그 대가를 제 조카가 치르고 있는 거겠죠.

“자각이 있어서 다행이네. 자넨 조카한테 잘해야 해.”

예, 제 모든 것이 무너지더라도…….


뭐 그것과는 별개로, 다음은 옛날 유행어를 활용한 작품을 써볼 생각이에요.

“흠~, 예를 들면?”

꽃중년처럼요. 예전에 두목 같은 사람을 그렇게 부르고 했던 거 기억납니까?

“아하~, 이 사람 쑥스럽게 말이야. 아하하! 뭐 그러긴 했지. 하지만 이젠 중년이라곤 도저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늙어버렸단 말이지…….”

ㅎㅎ, 아직 정정하세요. 이렇게 지금 다시 들어보면, 또 다른 의미로 색다른 느낌을 받는 신조어를 재활용해 보려고요. 옛 시절의 CC(캠퍼스 커플)를 소재로요.

“적절하네. 신선하면서도 녀석들의 욕구를 살살 자극하는 소재야. 이번에도 타협점을 잘 찾아낸 거 같아.”


…….

“왜 그러나, 침울해져선?”

두목은 질펀한 작품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ㅎ! 왜, 다음은 그런 걸 써보려고?”

가능성은 열어두는 편이 좋으니까요.

“특별히 적어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왜죠?


“이건 한참 개인 미디어가 발달하던 시기에 느낀 건데, 어디에나 적당한 수요가 있는 이유는 모두에게 적당한 포지션이 있기 때문이야.”

아~, 뭔지 알 거 같아요.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분야도 어느 정도 넓게 정해져 있고, 그중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느끼는 진행 방식도 정할 수 있었죠. 멍청한 알고리즘이 순식간에 내 취향을 파악해 버려서, 항상 비슷한 채널만 나오는 TV를 모두가 손에 움켜잡던 시대였어요. 그렇게 쏟아지는 콘텐츠를 현명하게 소비하기 위해선 철저하게 정해진 시간만 사용하거나, 언제나 능동적으로 공부할 수 있어야만…


“그래, 그래! 요점은 질펀한 성행위가 자네의 포지션이 아니라는 거야. 그런 섹스를 해본 적이 있나? 아니, 애초에 자넨 그쪽 경험이 풍부하지 않을 거야.”

네, 정확합니다.

“아까 말은 좀 심했지만, 뭘 고민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아. 항상 녀석들이 네 소설에 답답함을 드러내고 있겠지. 특히 다른 작품처럼 속 시원하게 인물의 몸매를 보여주지 않는 점에서 말이야.”

그것도 정확하네요. 항상 인물이 어떻게 근육질인지나 가슴 사이즈가 어떤지 등을 물어보거든요. 전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않아서…….


“그건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야. 네가 만약 질펀한 소설을 쓴다면, 아무도 네 작품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야. 그쪽으론 이미 대체물이 넘쳐나고 있으니까. 작품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지 않은가!”

! 과연 그렇네요. 생각이 짧았으~. 제가 갑자기 섹스의 스릴이 전투의 그것과 같다고 얘기하는 건, 전혀 맘에 안 드니까요.

“바로 그거야! 역시 척척 알아듣네!”


! 헉!!

“또 왜 그래?”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간드러지면서도 뒷맛은 전혀 안 찝찝한 게 내 글의 포지션이었던 거야. 자위 이후엔 불편한 자괴감을 느끼지만, 아직 신비로운 매력엔 그런 게 끼어들 수 없으니까! 분명 다들 내 소설보단 질펀한 작품을 많이 돌려서 볼 거예요. 하지만 공공연하게 얘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런 거에 꼴려서 헥헥거렸다는 게 치욕스러운 거지. 더러운 놈에게 농락당한 기분일 거야.”


그러니까요! 난 아직 사람들의 그런 허울을 먹고사는 거예요. 적당한 권력이 있으면 질펀한 판타지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지만, 그럼에도 질펀한 작품을 박해받은 성서처럼 고이 모셔두고 겉으로 쉬쉬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아름답고도 싱그러운 사랑 이야기를 사모하고 있어요. 그걸 역으로 판타지라고 여기면서 말이에요!

“…….”


두목님은 왜 그러십니까?

“혹여나 내가 죽어도 그런 얘기는 적지 말게. 특히 그 평등에 관한 건…”

네, 네. 저도 잘 압니다. 저도 무모한 일을 벌이진 않아요.

“그래, 그거면 됐어. 그게 자네 조카를 위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녀석들이 제 글을 읽다 보면, 언젠가 제 사상의 정체를 알게 될 겁니다. 우리가 작품을 소비하면서 지식을 다시 쌓기 시작한 것처럼. 저와 질펀한 작품이 녀석들의 좋은 글공부가 된 것처럼.

“거~, 참. 그거면 됐다고 해도.”



ㅎㅎ, 선대하곤 이런 얘기를 많이 했지. 이건 은하의 성년이 가까워졌을 때 나눴던 대화야.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지.


“막내 녀석을 조심해. 우리 소중한 은하를 노리고 있다고!”

젊은 녀석들끼리 알아서 하겠죠~~. ㅎㅎ

“자넨 도대체 왜 그러나? 나도 딸을 뺏기는 것 같은 심경인데! 요즘 얼마나 불안한지 몰러.”

우린 언제 부모 마음을 신경 썼던가요. 결국 눈 맞을 놈끼리 맞는 게 사랑입니다. 뭐, 동생 녀석이랑 제수씨가 원망스럽긴 해요. 어떻게 그렇게 좋은 유전자만 딱딱 물려주고 지랄인 건지…….

“그래, 그래! 내 말이 그런 뜻이여~. 아하하하!”

저라고 뭐 안 불안할 리 없잖습니까~.


“하지만 더 조심할 필요가 있어. 녀석의 의중은 분명 불경하다니까!”

뭐, 인간치고 안 그런 종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 막내와 은하의 자유를 믿어보려 합니다. 제 조카는 분명 저보다 야무지게 살아갈 거예요. 그걸 위해 전 뭐든지 할 겁니다.


“……. 나도 그런 자네를 믿겠네.”

? 무슨 말이시죠?

“아무튼 이상한 사고나 치지 말라는 거지!”



이렇게 난 음침하고 이상한 놈이야. 정말로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써갈 수는 없었지. 현실적으로 그래선 안 되는 거니까. 하지만 언젠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어왔어. 정말 헛되고 잘못된 방향의 믿음이었지. 좀 더 최근 이야기를 해볼게. 아마 더 이해하기 쉽겠지. 이건 선대가 죽고, 지금의 두목이 갓 왕좌에 올랐을 때 나눴던 이야기야.


“작가님, 모두를 이끄는 두목은 조금 누려야 한다고 하셨죠? 그럼, 제게 한 가지만 특혜를 주셨으면 합니다.”

? 뭔가요?

“작가님 소설의 아낙들은 가슴이 큽니까?”


엄…

“작가님, 제가 바라는 건, 작가님은 안 그러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뭔가 설명하기 힘들지만, 가슴이 크길 바라면서도 뭔가 그러지 않았으면 해요.”

ㅎ, 꽤 절박하시네요. 두목은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니까~. 언제나 완벽하게 일 처리 하는 사람이 말이야~~.

“!! 그럼, 제가 처음으로 아낙들의 가슴 크기를 아는 겁니까?”

ㅎ, 특권은 에로영화를 개인 소장하는 정도로 만족하시지 그래요. 그 아낙들의 가슴 크기는 안 봐도 뻔한 거지만~~.


“!!! 그야 그렇지만…….”

두목, 포르노를 가보처럼 여기는 것도 모르는 아낙의 가슴이 궁금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선대 두목도 그렇고, 나도 그런 시기를 보냈다니까~.

“쓰읍~~, 가보까진 아닌데요~~? 그렇게나 점잔 빼는 작가님도 의외로 그런 구석이 있었군요~~.”

이 배~~신자! 당신을 믿었는데! 내가 봤을 때, 막내의 날라리 기질은 널 보고 배운 거야!

“그 녀석이 저한테요? 농~담이죠?”

아뇨

“아하하하!”



ㅎㅎ 주로 이런 식이지만, 가끔은 진지한 얘기도 했지.


당신 아버지는 선구자예요. 누구보다 인간을 잘 이해하는 멋진 사람이죠. 강력하고, 노골적으로 비판적인 에세이를 쓰고, 좀 주먹 쓰는 날라리 아들을 둔 도서관 사서 말입니다. 마치 예수처럼 이 시대 최고의 멋쟁이였어요. 우린…, 그 뜻을 이어나가야 해요…….

“작가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지만, 제겐 그저 아버지일 뿐입니다.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누구보다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벽 말예요.”



그래, 그 조그만 날라리 녀석과 나눈 대화도 생각나는군…….


“작가님! 따님을 제게 주십쇼!”

딸이 아니야. 그리고 걔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할지는 본인 몫이지.

“저도 압니다. 뭔가 ‘따님을 주십쇼!’라는 대사를 해보고 싶어서….”

어떤 동경심인지는 알 거 같네.


“하지만! 전 작가님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뭐가 걱정이야? 둘이 잘하고 있고만, 뭘~.

“하지만 은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작가님인걸요. 제가 어떻게 그 차이를 메꿀 수 있을까요? 전 그녈 너무 사랑해요. 부디 제가 작가님을 이길 방법을 알려주세요.”

아하하하! 솔직히 자네가 맘에 안 들었지만, 지금 보니 안심이야.

“? 넹?”

걱정 마. 이게 무슨 말일지 모르겠지만, 계속 열심히 고뇌하면 돼. 자넨 맘이 순수하고 따뜻한 게 내 동생을 닮았어. 정말 감사한 일이야.

“????”



은하는 다부지게 자라줬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 하는, 멋진 녀석으로 말이야. 내가 비겁하게 글을 쓴, 유일한 보람이야. 녀석은 여성으로선 이례적으로 바이크 엔지니어의 길을 나아갈 수 있었거든. 더 비겁하게도, 내가 못 이룬 이상적인 세계를 녀석에게 맡기고 있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 녀석은 주변과 나를 올곧게 사랑할 뿐인데 말이야. 그 사랑이 내가 바라던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꼴이라니……. 언제 분노와 폭력이 모든 걸 앗아가 버릴지 모르는 일인데 말이야…….


손자가 생겨버렸어. 벌써 25살이 넘어버렸지. 난 어느새 조직의 원로 같은 존재가 되었고. 생각해 보니, 둘 다 정말 상상도 못 해본 일이야. 세상은 역시나 더 많이 파괴되었어. 두목이 죽었고, 막내 동기의 8할이 죽었지. 두목의 아들이 두목이 되었어. 역사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이건 정말 역사적인 일이야. 초기 이후에, 피붙이가 두목을 물려받는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 그들이 제1순위 제거 대상인 시대였으니까. 우리 조직은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특권계층의 유전자를 믿는 순딩이들이 아직도 꿈꿀 수 있는 곳이야. 세상이 이렇게나 나빠지는데, 내 특권은 거의 그대로라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 모두가 새 두목과 날 사랑해 주는……. 어쩌면 이게 내가 사랑한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르지. 정신을 최후까지 지키고 싶어 하고, 누군가를 섬겨야만 맘이 편안하고, 편안한 삶에 무뎌져 가면서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폭력 속에 방치되는 삶……. 어쩌면 내가 바란 유토피아를 오랫동안 살아온 건지도 모르겠어.


지금 내 손자의 나이 때의 난, 인류의 한계가 앞으로 50년이라고 생각했어.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시기가 아무리 늦어도 그 안에 찾아올 거라 여겼지. 지금 70년이 흘렀어. 난 어느새 100세를 바라보고 있지. 인류에겐 70년 만의 100세 시대야.


손자가 6살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어. 녀석이 갑자기 나처럼 글을 쓰고 싶다고 했거든. 그것도 시를! 난 그날은 물론이고 3일을 자지 못했어. 모든 것들이 80 노인을 흥분시키고 있었지.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


70년 만에 내 생각이 틀려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내 예측이 보기 좋게 틀린 건 분한 일이지만, 정말 다행이지. 인류가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는 역시 모르는 일인가 봐. 난 큰 착각을 하고 있었어. 인간이길 포기하는 건 인간이나 병든 지구가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분노인 거라고. 아직도 답을 알진 못하겠지만, 아직 우린 인간을 포기하진 않았어. 그래, 우리는 아직 말하기 힘든 것들을 말해주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따스한 마음의 멍청하고 잔인한 꿈돌이들이야. 정말 멍청이들이야~. 어떻게 50년 이상이나 속아줄 마음이 들어버리는 걸까. 인간은 정말 별수 없다니까…….



그래, 요즘은 어때요?

뭐, 항상 똑같죠. 재생에너지는 그저 그렇습니다. 폐기물을 노리는 불한당이 날마다 늘어나는 건 둘째쳐도, 원자력을 더 안전하게 지키긴 힘들 거 같아요. 여력이 많이 부족한데, 모든 게 점점 부족해지고 있으니까요.


두목, 이건 일종의 거래입니다. 놀라운 발전이란 없어요. 세상에 공짜가 있던가요.

맞습니다. 그래서 별일이 안 일어나게, 더 할 일이 없나 나름 고민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인류의 지도자들이 당신처럼 생각했으면, 지금이 좀 더 나은 세상일 터인데, 참 아쉬운 일이에요.

그건 좀 의견이 다르네요. 상황이야 다를 수 있지만, 그들도 분명 고민했을 거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과거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건 아니니까요.


……. 하여간~~ 점점 말솜씨가 기가 막힌다니까~~.

ㅎㅎ, 작가님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정말 좋네요.

아무튼, 두목의 말처럼 지금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너무 큽니다. 언제나 취할 건 확실히 취하고, 버릴 건 비정하게 버려야 해요. 우린 한 번에 하나밖에 못 하는 동물이니까요.



이제 눈앞에 모든 게 흐릿해져. 어느새 두목이 나보다 현명해졌기 때문은 아니야. 폭탄 소리가 뻥뻥 들려오고 있어. 아, 한국전쟁을 겪은 할머니가 폭탄 소리를 알려준 적이 있었는데. 평생 그 말을 이해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할머니 말에 틀린 말은 없었어. 폭탄은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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