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곱씹으며, 곱씹어서 시달리고 있는 이 말.
나는 말에 쉽게 상처를 받는 걸까.
연세 지긋한 어르신 중에 정말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신 분이 계신다.
그 어르신의 남편은 늘 상처를 주는 성격이다. 그렇지만 그 어르신은 절대 상처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렇게 인생이 즐거우실까? 평생을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느라 아이들을 대학 보내느라 힘드셨을 텐데. 정신력이 갑인 걸까?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이야기하다, 지켜보다가 깨달았다. 방금 전의 사건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 아니, 사건들에 크게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지를 않는다. 그 순간 지나간 일들은 과거이니까 집착하지 않으신다. 그저 현재에 머무르고 현재에 집중하시는 것이다. 바빠서가 아니다. 그분 마음의 시스템인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사신다. 처음에 바라보는 내 입장에서는 신기했고, 측근들은 좀 답답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르신이 계속 부러워진다. 그냥 흘려보내면 되는데... 흘려보낸다는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잊으면 되는데 말이다.
사실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것이다. 그 사람의 생각이고 철학이다.
어쩜 그는 들키고 싶지 않게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는데 나에게 들킨 것일 수도 있다.
그가 내뱉은 말들이 나를 향한 것이라고 해서 내가 주워왔어야 하는가?
내뱉은 말들이 허공에 떠돌거나 바닥에 팽개쳐져 있으면 될 것을 나는 굳이 마음에 담아와서 괴로워한다. 말한 사람은 마음의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렸는데, 나는 쓰레기통도 아닌데 기어이 그 말을 주워 왔다. 그 현장, 그 바닥에 두고 오거나, 공중을 떠돌다 휘발되게 남겼어야 했는데.
그가 한 말은 그의 것이니 내가 가져오지 말자.
내가 그 사건이나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소심하지만 큰 복수이다.
또 한 가지는 침묵이다.
그가 하는 말에 상처를 받는다고 반증하는 말들을 쏟아낸다. 괜스레 너덜너덜한 변명 같다. 어제의 상황에서 나는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대꾸를 하다가 언쟁이 일었다. 그런데 오늘 그를 또 대면해야 한다. 많이 불편한 일이다. 웃으면서 그를 맞아야 하는가? 티를 내며 마주해야 하는가?
어쨌든 어제의 티키타카는 해주지 않기로 한다.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 하는 상황일 때는 짧고 간결하게 말한다. 그의 의견이나 행동에 칭찬은 해주지 않는다. 맞장구도 필요 없다. 간단한 대답을 한다. 계속적으로 그의 의견이 맞냐고 주장해 올 때, 속으로 웃자. 이겼다. 상황의 주도권이 넘어왔다. 그는 속으로 애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는 속으로 이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침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일은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다. 협상의 기본은 말하지 않고 듣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냥 나는 듣는다.
침묵이 힘들 수도 있다. 힘들다. 그 의견에 반박하고 싶은데. 그거 아닌데.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올 것이다. 내 말들이 머릿속에서 허공으로 떠다닐 수도 있다. 침착하고 글로 쓴다. 연필을 들고, 혹은 타자를 치면서. 마음이 차분해진다. 글쓰기의 마법이다.
그리고, 자기 공감이 필요하다.
내가 나에게 말로 토닥여주어야 한다.
보통 우리는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속 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나도 종종 하던 일이다. 그런데 친한 친구여도 내가 겪은 상황을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을 수 있다. 친구가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때 그 기류의 흐름을 어찌 알겠는가. 사실상 같은 공간에서 같은 말을 들었어도 화살이 다른 이에게 꽂히지 않았다면, 다른 이는 나와 다른 감정일 것이다. 그를 아는 이라 해도 어쩌면 그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할 때는 더더욱 듣는 이는 듣는 척하다가 머릿속으로 다른 공간에 가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상황에서 주관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상대에게 충분히 공감받지 못하고 평가를 받아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내가 너였다면. 그 사람 입장에서 그게 아니지 않았을까? 와 같은 말들을 듣고 또 상처를 받는다. 자칫 싸울 수도 있고 친구 하나를 물리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잃을 수도 있다.
나를 잘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다.
나는 나를 잘 공감해 줄 수 있다.
그 상황을 제일 잘 알고, 나를 잘 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에게 공감해주어야 한다.
그 상황에서 이랬어야 했는데, 저랬어야 좋았는데. 이런저런 생각들로 나를 비판하고 또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나를 원망하지 않고. 전적으로 나는 내 편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럴만했어.
상처받을만했네.
그 상황에선 누구라도 속상했었을 거야.
힘들었지.
속으로만 되뇌지 말고 육성으로 소리 내어 나에게 말해주자.
"힘들었겠다."
"짜증 났겠네."
"잘 참았네."
뭐, 이런저런 것들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면 유머로 대응해 본다.
나 스스로 그 상황을 시트콤으로 전환시켜 들여다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안되면 좋아하는 코미디를 보거나. 유튜브에서 유쾌한 코믹물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가끔 예전에 즐겨보던 시트콤을 찾아볼 수도 있고. 나는 최근에 개그맨 유세윤 씨의 채널을 보고 기분 전환이 되었었다. 가끔은 유튜버들의 패러디나 상황극을 보며 깔깔 웃어댄다. 그러고도 풀리지 않으면 내가 좋아하는 활동들을 한다.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시원한 사이다를 먹고 큰 트림을 하거나.
생각해 보면 참 억울한 일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인데, 그의 말에 휘둘려서 내 머릿속에 떠도는 그 사람과 그의 말에 신경 써서 휘둘리는 것.
좋은 일도 많은데 내가 왜 나의 중심에 그를 앉혀 놓는가!
억울하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곧 다시 자신의 본래 행복 수준으로 되돌아오는 강한 탄력성을 지녔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행복의 자동온도조절장치'라 부른다.
지폐의 가치는 밟아도, 구겨져도 심지어 찢어져도 그대로다. 변하지 않는다. 즉, 다른 사람이 무어라 해도 나는 그저 나일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타인이 나를 흉본다고 해서 나의 가치나 존재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 김주환(2019). "회복탄력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