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장 6절~12절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성경을 몰라도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비슷한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아무 죄도 없다면서 하나님은 왜 사탄에게 욥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했을까?
이 의문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이유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욥에게 일어난 일은
인권적으로 굳이 이해하려고 하면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왜 성경에서 언급되는지 혼란하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인권이라는 것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맞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온라인상에서 만드는
캐릭터를 마음대로 선택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전지적 입장에서는 또 다른 결론을 추론할 있을 것 같다
결국 이 문제는 어느 관점으로 생각하고 믿느냐의 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욥의 이야기 중에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개신교는 배타적이고 좀처럼 세상적인 관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에
살면서 받아야 하는 억울한 면도 또는 모순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다.
소히 '억까당한다'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이런 상황들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사용된다.
억지로 비난을 받게 되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정체 모를 일이 일어나면
이해하기 위한 이론과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서 상황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내게 일어난 불행한(?) 상황들이 이해되지 못했을 때 억울한 마음이 강하다가
자책에 빠지게 되면서 좌절과 우울감에 빠져들다가 스스로 돌이켜 일어서려고 노력하다가
자책에서 오는 패배감보다 소중함에 대해서 감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억울함이 밀려오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는 계기나 명상 혹은 다짐을 하다가
모든 것이 알 수 없지만 어떤 뜻이 있을지 구하게 되는 과정을 지난 몇 년간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완전히 깨닫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소중함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불혹(不惑)의 나이를 지나서 지천명(知天命)에 이르기 전인데 아직도 멀었나 보다.
분명 잘못한 일들의 결과가 현재를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후회하면서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과거가 될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