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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Oct 20. 2023

가전 설치기사가 잘생긴 청년이라면

해치지 않아요.







이사를 오니 손을 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조명 기구 수리, 가스 개통, 정수기 설치, 인터넷, 식기세척기, 고장난 배관 수리와 에어컨 설치......


며칠 새에 수많은 설치 기사들이 집을 방문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 약속을 잡아야 하는 것과 잠시지만 낯선 이들과 집에 함께 있는 것들이 아주 편하진 않았다. 그래도 그들이 왔다가면 뭔가가 하나씩 작동을 했고 로소 살 만한 집이 되는 느낌이 들어 고마웠다. 




그날도 집에 가전을 장착하기 위해 설치 기사가 방문했다. 유니폼을 입고 생글생글 웃으며 등장한 그는 일본 배우 느낌의 잘생긴 젊은이였다. 나도 지금 내가 할머니처럼 글을 쓰는 걸 지만 그가 '잘생긴 젊은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므로 있는 그대로 적겠다.


나름의 서비스직 종사자라는 업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연신 꼬리를 흔들어대는 대형견 같은 귀여움이 묻어났다. 남발하는 미소와 나긋나긋한 서울 말투... 약간 부담스럽다가도 덩달아 웃음이 났으며 청량한 젊음에 눈이 부셨다. 그를 대하는 나의 감동이 너무 할줌마스러워서 스스로 좀 민망할 정도였다.


그는 오래된 가전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만화처럼 머리에 회색 먼지를 덮어쓰고 말았다. 옆에서 작업을 지켜보다가 놀라서 머리 머리, 먼지 먼지! 를 외치니 그가 무심결에 내게 머리를 숙여왔다. 뭐야, 털어달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저절로 그의 머리카락에 손이 갔다. 놀라서 바로 떼긴 했지만, 방금 상황 너무 느끼했다. 그 청년도 화들짝 놀랐다. 아 제가 털게요, 하더니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머리를 털었다. 사방에 먼지가 뿌옇게 날린다. 기침이 나온다. 코미디였다.




나만 쓰레기야?


대형견 같이 해맑던 그 청년은 그후 눈에 띄게 태도가 어색하고 딱딱해졌다. 어쩐지 나를 음흉한 아줌마로 치부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되게 억울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반듯한 아줌마였다. 그가 아주 귀엽긴 했지만 그건 훈훈하게 장성한 손주를 바라보는 외할머니의 마음과도 비슷했다.


그래도 그에게 '해치지 않아요'의 표정을 지어보이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서있기로 했다.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문득 예전 수영장에 다닐 때 젊은 수영 강사의 몸을 거침없이 터치하던 여사님들이 떠올랐다. 회비를 걷어서 강사님의 생일을 챙기고 나와 다른 미혼 여성들에게 유독 쌀쌀맞게 굴던 여사님들. 난 그녀들을 싫어했나 혐오했나, 아무튼 이해는 못했다. 내가 그 여사님들 같은 느낌을 낼 수 있을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좀 전의 순간이 약간 그런 느낌이었으려나 싶기도 하고......




청년은 마지막에 방심했는지 다시 한번 코미디 장면을 연출했다. 좁은 창고 안에서 뒷걸음치며 커다란 상자를 끌어당기다가 벽과 상자에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스스로 갇힌 꼴이 되었다. 그가 울상을 지으며 저 왜 갇혀있죠? 저 어떻게 나가죠? 물어왔을 때 귀엽긴 했지만 이번에는 안도와주고 다시 상자 밀고 나오세요, 라고 말했다. 그 젊고 잘생긴 허당에게 또다시 수영장 여사님들처럼 굴긴 싫었다.


이사한지 고작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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