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여자의 사업 이야기 / 재창업 6개월 차
재창업 초기였던 지난해 9월, 디자이너 용역비를 지불하기 위해 회사 통장에서 이체를 하려 했었다. 그런데 이체 한도가 넘는다고 이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은행에 전화를 했다.
"창업 통장은 1일 30만 원뿐이 이체가 안 돼요. 은행 창구에선 100만 원까지 됩니다."
"30만 원 넘는 돈이면 매번 은행에 가야 하는 건가요?"
"그렇죠."
"회사 통장인데요? 그러면 금액이 몇백만 원일 땐 매일매일 은행 가서 백만 원씩 쪼개 넣어야 한다고요?"
"처음 통장 만드실 때 설명 안 들으셨어요? 설명 들은 걸로 나오는데요. 통장 해지하면 한 번에 찾을 수 있습니다."
뭔 소리야?
기가 막혔지만 다시 공손하게 물었다.
"창업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명이 될 텐데, 뭔가 한도를 푸는 방법이 있을 거 아닙니까?"
"대표님은 현재 불가능해요. 나중에 부가세과세증명원을 떼서 은행에 와서 풀어야 해요."
"지금 매입매출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고 있는데 그걸 인쇄해 가면 안 되나요?"
"안 돼요. 요즘 대포통장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금감원에서 지시가 내려온 거예요. 저희가 한 게 아니에요."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회사 통장으로 납품 대금을 받아서 다시 외주 제작비를 부쳐줘야 하는데 통장을 막아 버리면 어떻게 해요? 대포통장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방법이 있을 거 아닙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저희가 실사를 나가서 대표님이 정상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방법이 있고요, 또 하나는 나중에 부가세과세증명원을 제출하는 방법이죠. 그런데 대표님은 집에다가 사업자를 냈잖아요. 그러니 실사를 나갈 순 없고요, 나중에 부가세과세증명원으로 해결하셔야죠."
"아니, 집에서 일하든 사무실에서 일하든 버젓이 세금계산서 끊고 원천세 신고하고 하면 됐지,..."
"저기요, 대표님, 제가 지금 앞에 다른 고객이 계셔서요, 길게 얘기 못하거든요. 어쨌든 지금은 안되니까 나중에 한번 나오셔서 설명을 다시 들으시죠."
정말 열이 받았지만 일단은 전화를 끊었다. 당시 담당자에게서 받은 내 느낌은 담당자가 우리 회사 통장을 대포통장이라고 아예 지레짐작을 해버린 것 같았다. 노인이 집에다가 사업자를 냈으니 이건 분명히 다른 삿된 목적이 있는 거라고 예단한 것이다. 이건 뭐, 노인 차별을 넘어 노인 학대 아닌가?
분하기는 했지만 방법이 없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불편한 대로 살아야지. 당시는 창업 초기여서 돈이 많이 나갈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일단 개인통장에 있던 돈으로 용역비나 인쇄비를 지불하고 회사 통장에 들어온 돈은 매일 30만 원씩 개인통장으로 인터넷 이체를 하며 살았다. 내 개인통장 이체 한도는 하루 1억이었는데 내 이름으로 된 사업자 통장을 30만 원으로 묶어 놓는다는 것은 뭔가 엉뚱한 규제로 생각됐지만 참기로 했다. 나중에 부가세과세증명원을 발급받아서 해결하면 된다고 했으니 이듬해 1월까지만 불편한 대로 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12월엔 달력 납품도 있고 해서 돈 액수가 커졌다. 한 번에 천만 원 이상이 들어왔고 나가야 할 돈들도 이삼백만 원씩 되었다. 열흘 동안 매일 은행에 가서 돈을 개인 통장으로 이체하고 며칠에 한 번씩 용역비나 인쇄비를 지불해야 하게 생겼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나중에 몇 천만 원 단위가 되면 어쩌라고. 할 수 없이 다시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회사 통장인데 이체 한도가 30만 원이라는 건 너무 불합리한 거 같아요."
"어휴, 저희도 이것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어요. 정부에서 그렇게 하라는데 어쩝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창업을 하고 있는데 정부도 뭔가 한도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놓았을 거 아닙니까?"
"풀 수 없어요. 창업 2년이 지난 후에 부가세과세증명원을 제출해야 해요."
"내년 초에 제출하는 것도 아니고 2년 후예요? 2년 동안이나 매일 은행에 가라고요?"
"규정이 2년 후라고 돼 있어서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 거래처에 돈 몇 백 보내려고 은행에 수 차례 가야 한다니. 다른 은행도 그렇습니까?"
"다 그래요. 우리가 정한 게 아니라 금감원에서 지시가 내려온 거라서 모든 은행이 그렇습니다."
"수십 년간 이 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이용해 왔는데 방법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 가요. 지난 5월에 폐업한 회사도 10여 년간 여기가 주거래 은행이었어요."
"통장은 계좌별로 별도 관리하기 때문에 수십 년 거래했다고 다른 통장까지 풀어주지는 않아요."
"말도 안 돼. 그러면 저 말고도 그 많은 창업자들이 전부 이체 한도에 묶인다고요? 설마 그렇지는 않을 거 아녜요? 대포통장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 아니에요."
"사무실을 정상적으로 운영한다는 걸 증명해야죠. 그러려면 사무실 조사를 나가야 하는데 대표님은 집에다가 사업자를 낸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조사를 나갈 수도 없고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증명이 안되잖아요. 방법이 없는 거죠."
"사무실을 내고 일하든, 집에서 일하든 정상적인 일을 해서 돈을 받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걸 증빙하는 게 왜 사무실이 있어야만 한다는 거죠? 저희 회사 통장 보면 어디서 돈이 들어왔는지 알 거 아녜요. 거기는 공공기관이에요. 정부에서 대금을 지불한 통장인데 대포통장이라니요. 아니, 소상공인을 돕는다는 둥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면서 이건 뭐, 영세업자는 대충 사업 접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 아, 공공기관에서 들어온 거 맞네요. 하지만 대표님은 집에다가 사업자를 내셨잖아요. 실사를 할 수 없잖아요."
"요즘 사무실 운영비가 얼마나 많이 나가는 줄 아세요? 보증금에 임대료까지 따지면 제 인건비를 넘습니다. 저희는 디자인을 위한 컴퓨터와 프린터만 있으면 돼요. 시설 자본금이 천만 원밖에 안 돼요. 저희같이 작은 회사가 사무실을 운영하면 일 년 안에 문 닫아야 해요. 더군다나 창업 초기라서 순수입은 제 인건비도 안되는데 그 돈마저 사무실 운영비로 다 나가고 이듬해엔 빚을 내서 사업을 꾸려나가야 합니다. 결국은 빚만 지고 망하는 거예요. 하지만 집에다가 사업자를 내면 고정비 지출이 없어서 절대 망하지 않아요. 근근이 먹고살면서 세금 잘 내고 빚 없이 살아가는 저 같은 사람들이 나라에는 더 이익 아닙니까?"
(빚이 없으니 은행에는 안 좋으려나?)
"저... 그러면 집에 사무실 집기나 시설이 있는 겁니까?"
"당연하죠. 인쇄소처럼 거대한 인쇄기는 없지만 디자인 회사에서 필요한 다목적용 프린터 정도는 있죠."
"그러면 실사를 한번 내 보내 볼까요? 조사받아 보시겠어요?"
"그래 주시면 너무 고맙죠. 우리가 납품한 책자들도 다 있어요. 매입 매출 세금계산서 다 있고요."
지난번에는 사무실이 집이라서 조사도 나올 필요가 없다더니 이번엔 심사를 내보내겠다고 했다. 하아, 정말 사람에게 굴욕을 안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며칠 후 조사 담당자가 집으로 왔다. 내가 준비해 놓은 6개월간의 각종 세금계산서와 납품 책자들, 사무실 집기 등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간단히 실사를 마쳤다. 10분도 안 걸렸다.
다음날 은행에서 전화가 왔고 아무 때나 나와서 서류 하나만 작성하면 한도가 풀린다고 했다. 서류 하나를 또 작성하러 가야 한다고요? 한숨을 쉬며 내가 물으니 은행 직원은 멋쩍은 듯 웃으며 나오셔야 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바로 은행에 갔고 한도는 바로 풀렸다.
시중 은행들이 구태의연한 걸까? 내가 만난 은행 직원의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혹시 젊은이들은 출판단지에 가면 거기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개 나이 든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이미 10년 전에 1인 출판기획사를 미래 유망업종으로 꼽았었는데, 시중 은행에선 그런 자료들도 안 보나?
처음에 회사 통장 개설을 할 때 내가 분명히 확인하지 않은 사항들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조금 의혹이 가면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는데 지금 기억해 보면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뭔가 내가 놓친 것들이 있었으리라. 다시한번 '정신차리고 일해야지'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이 들어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경우가 드문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