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하는 방법

by 엄면

두 번째 용기가 나를 구하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싶은 마음만은 붙잡고 싶었다.





약을 먹는다는 건 생각보다 긴장되는 일이었다.

병원을 다녀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을뿐더러 결국에 내가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요동쳤다.

하지만 나에겐 병원의 문턱을 넘었다는 것만으로도 벽을 뚫고 나온 것 같았고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처방받아온 약을 먹기 시작했다. 사실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다.

스스로 병원에 가고 약을 타오는 것은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는 끝판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처음 처방받은 2주 치의 약을 다 먹었지만 효과는 미비했고, 오히려 정신이 몽롱해지거나 배변활동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2주 뒤 다시 병원을 찾아 자초지종을 설명 후 새로운 약으로 바꿨지만 이번에는 몽롱함과 동시에 입맛조차 사라져 버렸고 살도 빠지기 시작했다.


감기약처럼 먹기만 하면 금방 호전되는 줄 알았는데 몸의 불편함으로 마음이 더 무거웠고 나는 또다시 병원을 방문해 의사 선생님에게 털어놨고 돌아오는 선생님의 대답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힘들었으니 맞는 약을 찾는 것도 시간이 걸릴 거예요”

선생님의 그 한마디에 괴로워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동안 실패와 후퇴를 수 없이 반복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견뎌보고 싶었다.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나는 용기를 낸 사람이었고, 나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땅속으로 박힌 자존감이 조금은 고개를 든 기분이었다.


한동안은 2주에 한 번씩 진료를 받으며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처음에는 솔직히 짧은 진료시간과 만족스럽지 못한 약 효과에 반신반의 한 마음이 컸지만, 의사 선생님은 나의 상태를 차근차근 들어가며 조율해 가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조금씩 안심이 되었다.

진료시간은 상담을 하는 것만큼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없었지만 병원을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내 우울감이 단순한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는 걸, 전문적인 도움으로 다스려야 하는 ‘병’이라는 걸 깨닫기도 했다.


그렇게 약을 조율한 지 3개월쯤 되었을까?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돌덩이 같던 몸과 마음이 예전보다 조금 가벼워졌고, 특히나 별 거 아닌 일에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제일 큰 변화는 누군가의 말이 칼처럼 꽂히는 순간이 점점 무뎌지고 감정이 요동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까운 가족들과 친구들이 느낄 만큼 내 주변의 회색의 공기는 어느새 밝고 청량해 보였다.

길에 걸어가는 사람만 봐도 피곤하던 지난날과는 달리 대화하는 시간이 즐겁기도 했다.

불안과 우울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길을 걷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도, 카페에서 마주한 낯선 사람조차 따뜻해 보였다.

내가 이렇게 사소한 것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나조차도 내가 낯설 만큼 즐거운 날도 있었다.


물론 공황은 여전했고 어떤 날은 사는 것이 허무하기도 했다.

약을 먹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드라마틱하게 달라지는 건 정말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불안이 올 때마다 ‘이것 또한 이겨낼 수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내 감정에 더욱 귀 기울일 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의 터널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어느새 비상구를 찾아 빛이 보였고 빠져나갈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병원의 문턱을 넘은 것 자체가 나에게는 작은 승리였다.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두렵기도 하지만 이 용기 낸 마음을 이번엔 조금 더 오래 견뎌보리라 마음먹었다. 오늘이 마냥 행복하진 않아도 방법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내일을 맞이할 힘이 생겼다.



나의 용기가 완벽하게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 마음의 터널 끝에 있는 빛을 보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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