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 이제야 알게 됐다."
약을 먹기 시작한 지 어느덧 몇 개월이 지났다.
삶이 변할 만큼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지만 아주 작고 조용한 변화들이 내 일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잠에서 막 깨어난 몸을 천천히 일으킬 때, 무수한 사람들 무리에 속해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적막한 순간에도.
예전 같으면 무겁고 두려웠던 순간들이 이제는 조금 덜 버겁다.
간혹 가다 눈을 뜨는 게 무서웠던 그 시간들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다시 나를 덮칠 불안과 공허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던 그 순간들.
하지만 이제는 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바람을 상쾌하게 느낄 여유가 생겼고 가끔은 하늘이 예뻐 보여 사진을 찍곤 한다.
그런 순간순간들이 모이면서 살려고 발버둥 친 내가 기특하고 대견하게 느껴졌다.
인간관계도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에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긴장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자주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하지만 어느 날, 오랜만에 나간 모임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조용히 앉아 있고 생각도 많았지만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나 자신을 어색하게 여기지 않고 그냥 ‘괜찮다’고 느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감정이 올라올 땐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지금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천천히 들여다보려 한다.
예전 같았으면 감정에 질질 끌려 다녔겠지만 지금은 감정을 나와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슬프면 그냥 슬픈 대로, 불안하면 그런 나를 다정하게 감싸주는 말을 속으로 건넨다.
“괜찮아. 너는 이미 잘 버티고 있어.”
이 짧은 문장이 마음속에 천천히 가라앉을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음을 느낀다.
약을 먹는 일상도 처음처럼 두렵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이게 내 삶을 돕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안다.
약이 나를 완벽하게 낫게 하지는 않지만 내가 나로 돌아가는 길을 함께 걸어주는 동행자라는 걸.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우울증이라는 친구와는 멀어지기도 가깝게 지내는 날도 무수히 반복될 것이다.
이유 없이 주저앉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우울증과 함께하는 스스로를 원망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울증이라는 감정이 찾아올 때면 타인의 말보다 내 안의 마음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된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쉽게 무너졌지고 힘들어했지만 요즘의 나는 그 말들이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나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지금도 나 자신을 믿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불안한 날이 있고 눈물이 터지는 날도 있다.
마음이 다시 무너지는 것 같아 두려워지는 날엔 한 없이 추락하는 기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은 그 감정 속에서도 ‘괜찮아질 수 있다’는 마음을 함께 안고 있다는 것이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
더딘 걸음이지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 자신을 위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테니까.
그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결국 나를 다시 괜찮은 자리로 데려다줄 것이라 믿으니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우울증'과 이별하고 싶지만 그건 너무너무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는 것을.
그래서 생각의 관점을 바꿨다.
나는 우울증과 친해지는 법을 알아가는 중이다.
나는 지금 다시 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아끼며.
우울함은 그저 함께 살아가는 또 하나의 감정, 나의 일부가 되었지만
나는 오늘도 그 감정과 함께 천천히 살아가며 배운다.